파편들

2015.01.04 06:30 from 흐름

(0) 이 글은 왜 쓸까? 나는 우리 모두가 예술가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삶으로 저마다의 예술을 펼치는 그런.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예술가”들에게 그림은 왜 그리는지, 음악은 왜 연주하는지, 연기는 왜 하고, 이야기는 왜 지어내는지 묻는다면 그들은 뭐라고 대답할까?

지금 나에게 글은 왜 쓰냐는 질문은 그런 질문들과 과연 동치의 관계에 있는 것일까? 차라리 그들에게 TV는 왜 보고, 친구들과 메시지는 왜 주고 받고, 신문 기사는 왜 읽고 있냐고 묻는 질문과 같은 차원의 것이라고 하는 쪽이 더 그럴듯하지는 않을까?

어떻게 보면 대답할 필요가 있을까 싶은, 대답하기 귀찮은 질문들, 평소라면 하지 않을 그런 질문들을 계속 하고 있다. 왜 한국에는 빅맥 세트가 3유로 정도 밖에 안하는가? 왜 독일에는 상하이 스파이스 치킨버거가 없는가? 한국 버터는, 푸딩은 왜 이렇게 비싼가? 그리고 이렇게 질문하는 것은 과연 바람직한 것인가?

(1)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우리는 알게 될 것이다.” 힐베르트는 왜 그런 수학자 답지 못한 무책임한 명제를 남겼을까? 본회퍼의 삶과 신학을 떨어트려서 보는 것은 가능한가? 그게 좋은 일인가? 누가복음서의 저자는 과연 바울서신에 언급되는, 골로새서가 말하는 “의사 누가”인가? 그렇게 믿는 것이 좋은 것인가? 예배당에서 제단이 사라진 이유와 강단 뒤의 십자가가 스크린으로 덮힌 이유는 서로 충돌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1a) 사실의 판단은 그 옳고 그름을 누구에게 묻든 같은 대답을 들어야 하는 문제다. 현대의 학문은 대부분 이 문제를 놓고 씨름한다. 많은 사람들이 어떤 학문을 놓고 과학인가 아닌가를 정의할 때, 이 문제를 다루는지 아닌지를 본다. 나는 누가복음이라는 문서를 쓴 사람이 골로새서의 “의사 누가”라고 굳이 믿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성서는 이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누가복음서, 사도행전 어디에서도 저자의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단지, 이레네우스 이래로 그렇게 추측해온 이론이 교회의 전통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회의적으로 사고하고, 종교에 일반적으로 비판적인 이들은, 교회가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누가복음의 저자는 의심할 여지 없이 누가”라는 가르침을 줄 때, 이것을 도그마라고 부르며 공격한다. 종교의 문제에 대해서 “왜?” 라고 질문하는것, 그리고 그 “왜?”에 답하는 것, 이것이 불가능하다고 보기에, 소통의 가능성이 없다고 보기에 교회를 비판한다. 소통가능성이 사라질 때, 그 문제는 공적인 영역이 아니라 사적인 영역으로 남는다.

헤르만 바빙크는 “어떻게 아는가?”라는 질문에 “‘성령이 알려주신다’는 것 이상으로는 알 필요도 없고 알려고 해서도 안된다”고 했다고 한다. 하나님의 권위에 의지하고 맡기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문제에 그러한 답변으로 일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존 스토트의 책을 읽다가 그가 인용한, 작년에 작고한 판넨베르크의 글귀가 마음에 들었다.

“설득력이 없는 메시지가 단지 성령에 의존한다고 하여 설득력을 얻을 수는 없다… 기독교 메시지의 설득력은 그 내용으로부터만 나올 수 있다. 내용이 없을 경우 성령에의 의존이 전파자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논증과 성령의 역사는 상호경쟁적인 것이 아니다. 바울은 성령에 의존하면서도 생각과 논증을 아끼지 않았다.”

“정말로 그러한가?”, “왜 그러한가?”라는 논증의 가장 밑바닥에는 의심이 있다. 의심을 단순히 믿지 않는 것이라고 얕게 치부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의심이라는 소금 없이 굳건한 믿음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더욱 치열하게 싸워야 한다. 더욱 겸손하고 엄격해져야 한다. 그래서 그 질문들을 뛰어 넘어야한다.

(1b) 하지만 신앙이란 어쩐지 교회 밖에서만 사적인 문제로 여겨지지 않는다. 성서에 쓰여진 “말씀(Logos)”이라는 단어는 아무런 의심 없이 “기록된 말씀(Scripture)”과 동치의 관계로 받아들여진다. 그리고 이를 통해 말씀은 “함께 듣는 것”에서 “스스로 읽는 것”으로 그 무게가 옮겨져 갔다.

듣는 것과 읽는 것 사이에는 질적인 차이가 있다. 바울은 믿음이 들음에서 난다고 했다. 순수한 들음은 인격적인 경험이다. 듣기 위해서는 화자와 청자가 시공을 공유해야 한다. 그들이 같은 때와 같은 곳에 있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부버의 개념을 어쭙잖게 조금 빌려오자면, 듣는 것은 “나와 너(Ich und Du)”의 관계에서만 가능하다.

하지만 세상이 변한 것은 사실이다. 사람들은 늘 대체재를 개발해왔다. 그림, 글, 녹음기, 카메라, … 하지만 어떤것도 “들음”이 가지고 있는 본래의 모습(Substantiality)을 완전하게 대체할 수는 없다. 이것들은 “나와 그것(Ich und Es)”의 관계일 뿐이다. 혼자 끙끙거리며 이사야서를 읽던 에티오피아 내시의 마음을 흔들어 놓은 것은 빌립이 전했던 어떤 정보 때문만이 아니라, 그와의 만남이고, 그를 통한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이라고 생각한다.

들음은 본질적으로 수동적이다. 누군가에게 의지해야 하는 일이다. 내가 보기 싫고, 읽기 싫은 것은 눈 감아버리면 그만이다. 하지만 나의 귀는 닫을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들려지는 말씀”이다. 교회의 전통은 언제나 성서가 읽혀지게 해서 함께 듣는 것이었다. (Col 4:16, 1Th 5:27) 듣는 것은 내가 듣고 싶다고 해서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듣는 것은 하나님이 가능케 하시는 일이다. 하나님이 주어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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