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신교신학 입문?

2015.04.12 13:07 from 흐름

바르트의 마지막 강의인 "Einführung in die evangelische Theologie"가 지난해 한국어로 다시 번역되어 출간되었다. 마지막 장인 "사랑(Die Liebe)"은 녹음되어서 LP판으로 나오기도 했고 칼 바르트 아카이브 웹사이트에서 20초 가량 짧게나마 들어 볼 수도 있다. 

한국어 역본은 이전에 이형기 선생님의 것이 있었는데 직접 접해본 적은 없고, 이번에 새로 나온 책도 인터넷에서 몇 장 미리보기로 봐서 번역이 어떤지는 모르겠다. 물론 신준호 선생님이야 그동안 바르트 번역으로 내공이 깊으신 분이니... 그런데 책 제목에 관해서라면, 만약 바르트가 한국어를 했다면 개신교신학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할 지는 좀 궁금해진다. 

독일에서 그냥 기독교인이라고 하거나 신학을 전공한다고 말하면 대부분 이런 질문을 듣게 된다. "Katholisch oder evangelisch?" 가톨릭이냐 개신교냐는 것이다. evangelisch라는 단어는 원래 복음적이라는 의미이지만, 문맥적으로는 개신교라는 의미를 가진다. 이와 구분되는 evangelikal이라는 단어도 별도로 있는데, 이는 한국에서 흔히 말하는 "복음주의적" 또는 영미권에서 쓰이는 "evangelical"의 의미와 비슷하다. 이 때문에 '복음주의 신학'이라는 말은 evangelical theology라는 영어 단어나 evangelikale Theologie라는 독어 단어의 번역어로는 적절할 수는 있겠지만 evangelische Theologie라는 독어의 번역어로는 부적절하다고 본다. 

신 선생님의 번역에서도 나타나듯 evangelisch라는 말은 복음적이라는 본래적 의미와 개신교적이라는 문맥적, 상황적 의미를 모두 함축하고 있다. 만약 이 강의의 제목이 바르트의 것이 아니라 그냥 어느 대학의 강의 목록(Vorlesungsverzeichnis)에서 온 것이었다면 "개신교신학 입문"이라는 번역은 별 문제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바르트가 의도하고, 여기서 이야기하고 있는 Evanglische Theologie가 가지고 있는 의미는 그것보다 이 단어의 본래적 의미인 복음적 신학에 더 가까워보인다. 이는 제 1강에서부터 잘 드러나는데, 다음의 대목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Es genüge also ohne alle distanzierende oder auch kombinierende Gegenüberstellung und Wertung die einfache Anzeige: die Theologie, in die hier eingeführt werden soll, ist die evangelische Theologie. Das erklärende Adjektiv erinnert an das Neue Testament und zugleich an die Reformation des 16. Jahrhunderts. Es mag gleich auch als das doppelte Bekenntnis gelten, dass die Theologie, um die es hier gelten soll, die ist, die von ihrem verborgenen Ursprung in den Dokumenten der Geschichte Israels her zuerst in den Schriften der Evangelisten, Apostel und Propheten des Neuen Testaments unzweideutig ans Licht getreten und die dann in der Reformation des 16. Jahrhunderts neu entdeckt und aufgenommen worden ist. Konfessionell ausschließlich kann und soll der Ausdruck (schon weil er zuerst und entscheidend auf die in allen Konfessionen irgendwie respektierte Bibel zurückweist) nicht gemeint sein und verstanden werden. Nicht alle "protestantische" ist evangelische Theologie. Und es gibt evangelische Theologie auch im römischen, auch im östlich-orthodoxen Raum, auch in den Bereichen der vielen späteren Variationen und auch wohl Entartungen des reformatorischen Neuansatzes. Mit "evangelisch" soll hier sachlich die "katholische", die ökumenische (um nicht zu sagen: die "konziliare") Kontinuität und Einheit all der Theologie bezeichnet sein, in der es inmitten des Vielerlei aller sonstigen Theologien und (ohne Werturteil festgestellt) verschieden von ihnen darum geht, den Gott des Evangeliums, d.h. den im Evangelium sich kundgebenden, für sich selbst zu den Menschen redenden, unter und an ihnen handelnden Gott auf dem durch ihn selbst gewiesenen Weg wahrzunehmen, zu verstehen, zur Sprache zu bringen. Wo es sich ereignet, dass er der Gegenstand menschlicher Wissenschaft und als solcher deren Ursprung und deren Norm wird, da ist evangelische Theologie. (S. 11-12)

다음은 신 선생님의 번역이다. 

여기서 그러한 많은 신학들을 멀리하거나 혹은 그 신학들과 결합하려는 어떤 만남이나 평가는 없다. 여기서는 다음과 같이 제시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우리가 소개하려는 신학은 "개신교신학"이다. "개신교적" 혹은 "복음적"이라는 두 가지의 의미를 지닌 "evangelisch"라는 독일어 형용사는 신약성서와 16세기 종교개혁을 생각나게 한다. 그래서 여기서 전개될 '개신교(복음적)신학'과 관련해 다음 두 가지가 고백된다. 첫째, 그 신학의 근원은 먼저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 은폐되어 있었다가 신약성서의 저자들, 사도들, 예언자들의 문서 안에서 명확하고 밝게 드러났다. 둘째, 그 근원은[각주:1] 그 후 16세기의 종교개혁에서 재발견되고 재수용되었다. 그러므로 "개신교적"(복음적)이라는 표현은 어느 한 교파만을 배타적으로 지칭할 수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 왜냐하면 그 표현은 모든 교단이 어떤 방식으로든 존중하는 성서를 우선적·결정적으로 가리키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프로테스탄트 신학"이 복음적인 개신교신학인 것은 아니다. 또한 로마교회의 영역에도, 동방 정교회의 영역에도, 그리고 종교개혁적 새 명제가 변주되고 더 나아가 변질된 훨씬 후대의 영역에도 복음적 신학은 존재할 수 있다. 여기서 내적으로 "보편적"(가톨릭적)이라는 의미는 "복음적"(개신교적)이라는 의미와 함께 모든 신학들의 연속성과 통일성을 가리킬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공의회적'이 아니라 '교회일치적'이라는 의미에서 그러하다.[각주:2] 이제 우리의 "개신교신학"을 다른 많은 종류의 신학들 한가운데서 그것들로부터 (아직 어떤 확정적인 가치판단은 없이) 구분하는 것은 다음에 달려 있다. 개신교신학은 복음의 하나님을, 즉 복음 안에서 스스로를 알리시고 인간에게 말씀하시며 인간들 사이에서 인간에게 행동하시는 하나님을 (바로 그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방법에 의해!) 인지하고 이해하고 언어로 표현한다. 바로 그 하나님이 인간적 학문의 대상이 되시는 곳, 바로 그분이 그 신학의 근원과 규범이 되시는 사건이 발생하는 곳, 그곳에 개신교신학은 존재한다. 

몇몇 부분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 '복음적 신학(die evangelische Theologie)'이라는 번역어를 일관적으로 사용하면서 직역에 가깝게 옮겨보았다.

그래서 거리를 두려거나 혹은 결합하려는 비교와 평가 없이, 다음의 한마디면 충분할 것이다. 여기서 소개될 신학은 복음적 신학(die evangelische Theologie)이다. 복음적(evangelisch)이라는 형용사는 신약 성서와 16세기 종교 개혁을 동시에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두가지 고백이 성립하는데, 여기서 다뤄질 신학이 이스라엘 역사의 문서 속에 감춰진 뿌리로부터 먼저 신약 성서의 복음사가, 사도들, 예언자들의 기록에서 분명하게 나타난 신학이며, 그 후 16세기 개혁 속에서 새롭게 발견되고 받아들여진 신학이라는 것이다. 이 표현은 (우선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 표현이 모든 교파에서 어떻게든 존중하는 성서를 지칭한다는 사실 때문에라도) 교파를 구분하는 의미로 쓰일 수 없고, 그렇게 쓰여서도 안되며, 그렇게 이해될 수도 없고, 그렇게 이해되어서도 안된다. 모든 "프로테스탄트" 신학이 복음적 신학인 것은 아니다. 로마 교회나 동방 정교회의 권역에서, 또한 종교개혁적 새 출발에서 발생한 많은 후대의 변형들과, 나아가 변종들의 영역까지에서도 복음적 신학은 존재한다. "복음적"이라는 말은 여기서 객관적으로 이 신학의 모든 보편적, ("공의회적"은 말할 필요도 없고) 교회일치적 연속성통일성을 지칭하는 것으로 사용되어야 하며, 그러한 모든 수 많은 신학들의 중심에서, 또한 (가치판단을 내리지 않고) 이 신학들과 다르게 복음하나님을, 즉 복음 안에서 자신을 알리시고, 스스로 인간에게 말씀하시며, 인간들 속에서나 인간들 곁에서 행동하시는 하나님을, 그분이 스스로 지시하시는 길로 받아들이고 이해하며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이 신학 속에서 하려는 것이다. 그분께서 인간적 학문의 근원으로나 규범으로나 그 학문의 대상이 되시는 일이 발생하는 곳, 그곳에 복음적 신학이 있다. 

바로 이 대목에서 바르트가 여기서 이야기하려는 신학이, 단순히 개신교라는 '교파의 신학'이 아니라, '복음의 하나님을 다루는 신학'임을 알 수 있다. "모든 개신교 신학이 복음적 신학"인 것도 아니고, 가톨릭 교회나 정교회에서도 이 '복음적 신학'은 존재한다. 

또한 바르트가 직접 서문을 쓴 미국판이 '복음주의 신학'이라고 오해될 수 있는 Evangelical Theology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을 보아도, 바르트가 evangelisch라는 단어의 '개신교적'이라는 의미보다 '복음적'이라는 의미에 무게를 더 두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새로운 번역이 나온다는 것은 반가운 일임이 틀림없다. 



개신교신학 입문

저자
칼 바르트 지음
출판사
복있는사람 | 2014-10-15 출간
카테고리
종교
책소개
칼 바르트의 마지막 명강의를 만나다! 새로운 번역과 장정으로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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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원문의 구조를 고려하면 사실 재발견되고 재수용된 것은 '근원'이라기보다 '(복음적) 신학'이라고 봐야 한다. [본문으로]
  2. um nicht zu sagen이라는 관용구가 잘못 해석된 것 같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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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Fleur de Sel 트랙백 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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