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리아 배어: 다리 자유[각주:1]의 종말


무더위는 얼마나 짧은 옷까지도 우리 사회가 받아들일 수 있는지 많은 이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이 질문은 '학교에서의 짧은 옷 금지'라는 바보 같은 아이디어의 고전을 다시 수면 위로 띄운다.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의 한 중학교가 여학생들이 핫팬츠와 배가 드러나는 상의를 입는 것을 금지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 금지령은 남학생들에게도 적용된다. 트위터에 올라와 "‪#‎핫팬츠금지(#hotpantsverbot)‬"라는 해시태그를 통해 뜨거운 토론의 대상이 된 학교 측의 가정통신문은 남학생과 여학생 모두를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10대 남자아이가 이런 옷을 선호하는 것은 흔하지 않으므로 누구를 대상으로 한 금지인지는 분명할 것이다.


학교 측의 이러한 무리한 요구가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미 다른 곳에서 시행되고 있는 사례에 따라 바덴-뷔르템베르크에서도 옷을 잘못 입은 여자아이들은 커다란 티셔츠를 받고 이를 종일 입어야 한다. 이 티셔츠가 수치의 상징이 될지 아니면 그보다는 명예의 휘장이 될지는 책임자들이 곧 알아낼 것이다.


무감각 혹은 가벼운 흑심?


이 가정통신문에서 불쾌한 점은 그보다 여자아이들의 "매우 도발적인 의상"이라는 표현이다. 이 중학교에서 가장 높은 학년은 10학년이므로, 여기서는 10세에서 16세 사이의 여자아이들이 대상이 된다. 아이들이 의도적으로 나쁘게 옷을 입는다고 이렇게 통틀어서 질책하는 것은 어떤 부적절한 핫팬츠보다도 구역질 난다.


또한 궁금한 것은, 누가 이 청소년들의 모든 배와 다리를 도발적으로 느낄 것이냐는 것이다. 학교 측은 분명 교사들이 그럴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문제가 되는 것은 속살을 보고 다른 마음이 생기지 않도록 학교로부터 지도받아야 할 남자아이들이다. 이것은 하지만 여러 측면에서 우스꽝스럽다. 우선 남자아이들에게도 청바지를 허벅지에 걸쳐 입으면서 속옷을 드러내 보이는 패션이 있다. 여자아이들이 이러한 모습을 보고 받는 불만을 생각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두 번째로 사람들은 이 십대 아이들이 무서울 정도로 포르노 소비에 무감각해져 있다면서 계속해서 이 아이들을 질책한다. 그토록 대단한 이 남자아이들이 여자아이들의 다리를 보고 딴생각을 품을까? 허무맹랑하다. 또 세 번째는, 알려진 대로 아이들은 학교에서 교과 내용만 배우지 않는다. 학교는 청소년들이 자신을 시험해보는 곳이다. 이에는 물론 한 번쯤 부적절하게 옷을 입는 것도 포함된다. 또한, 다른 아이들이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을, 곧장 성적으로 강하게 느끼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도 포함된다. 드러난 다리가 초대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뚫어지라 쳐다보는 것조차도!) 남자들이 배우는 것은 언제라도 이르지 않다.


원문: http://www.faz.net/aktuell/gesellschaft/menschen/hotpantsverbot-das-ende-der-beinfreiheit-13689760.html




  1. '다리 자유(Beinfreiheit)'의 사전적 의미는 "차량이나 객석에서 다리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것(두덴)"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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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신학 입문?

2015.04.12 13:07 from 흐름

바르트의 마지막 강의인 "Einführung in die evangelische Theologie"가 지난해 한국어로 다시 번역되어 출간되었다. 마지막 장인 "사랑(Die Liebe)"은 녹음되어서 LP판으로 나오기도 했고 칼 바르트 아카이브 웹사이트에서 20초 가량 짧게나마 들어 볼 수도 있다. 

한국어 역본은 이전에 이형기 선생님의 것이 있었는데 직접 접해본 적은 없고, 이번에 새로 나온 책도 인터넷에서 몇 장 미리보기로 봐서 번역이 어떤지는 모르겠다. 물론 신준호 선생님이야 그동안 바르트 번역으로 내공이 깊으신 분이니... 그런데 책 제목에 관해서라면, 만약 바르트가 한국어를 했다면 개신교신학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할 지는 좀 궁금해진다. 

독일에서 그냥 기독교인이라고 하거나 신학을 전공한다고 말하면 대부분 이런 질문을 듣게 된다. "Katholisch oder evangelisch?" 가톨릭이냐 개신교냐는 것이다. evangelisch라는 단어는 원래 복음적이라는 의미이지만, 문맥적으로는 개신교라는 의미를 가진다. 이와 구분되는 evangelikal이라는 단어도 별도로 있는데, 이는 한국에서 흔히 말하는 "복음주의적" 또는 영미권에서 쓰이는 "evangelical"의 의미와 비슷하다. 이 때문에 '복음주의 신학'이라는 말은 evangelical theology라는 영어 단어나 evangelikale Theologie라는 독어 단어의 번역어로는 적절할 수는 있겠지만 evangelische Theologie라는 독어의 번역어로는 부적절하다고 본다. 

신 선생님의 번역에서도 나타나듯 evangelisch라는 말은 복음적이라는 본래적 의미와 개신교적이라는 문맥적, 상황적 의미를 모두 함축하고 있다. 만약 이 강의의 제목이 바르트의 것이 아니라 그냥 어느 대학의 강의 목록(Vorlesungsverzeichnis)에서 온 것이었다면 "개신교신학 입문"이라는 번역은 별 문제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바르트가 의도하고, 여기서 이야기하고 있는 Evanglische Theologie가 가지고 있는 의미는 그것보다 이 단어의 본래적 의미인 복음적 신학에 더 가까워보인다. 이는 제 1강에서부터 잘 드러나는데, 다음의 대목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Es genüge also ohne alle distanzierende oder auch kombinierende Gegenüberstellung und Wertung die einfache Anzeige: die Theologie, in die hier eingeführt werden soll, ist die evangelische Theologie. Das erklärende Adjektiv erinnert an das Neue Testament und zugleich an die Reformation des 16. Jahrhunderts. Es mag gleich auch als das doppelte Bekenntnis gelten, dass die Theologie, um die es hier gelten soll, die ist, die von ihrem verborgenen Ursprung in den Dokumenten der Geschichte Israels her zuerst in den Schriften der Evangelisten, Apostel und Propheten des Neuen Testaments unzweideutig ans Licht getreten und die dann in der Reformation des 16. Jahrhunderts neu entdeckt und aufgenommen worden ist. Konfessionell ausschließlich kann und soll der Ausdruck (schon weil er zuerst und entscheidend auf die in allen Konfessionen irgendwie respektierte Bibel zurückweist) nicht gemeint sein und verstanden werden. Nicht alle "protestantische" ist evangelische Theologie. Und es gibt evangelische Theologie auch im römischen, auch im östlich-orthodoxen Raum, auch in den Bereichen der vielen späteren Variationen und auch wohl Entartungen des reformatorischen Neuansatzes. Mit "evangelisch" soll hier sachlich die "katholische", die ökumenische (um nicht zu sagen: die "konziliare") Kontinuität und Einheit all der Theologie bezeichnet sein, in der es inmitten des Vielerlei aller sonstigen Theologien und (ohne Werturteil festgestellt) verschieden von ihnen darum geht, den Gott des Evangeliums, d.h. den im Evangelium sich kundgebenden, für sich selbst zu den Menschen redenden, unter und an ihnen handelnden Gott auf dem durch ihn selbst gewiesenen Weg wahrzunehmen, zu verstehen, zur Sprache zu bringen. Wo es sich ereignet, dass er der Gegenstand menschlicher Wissenschaft und als solcher deren Ursprung und deren Norm wird, da ist evangelische Theologie. (S. 11-12)

다음은 신 선생님의 번역이다. 

여기서 그러한 많은 신학들을 멀리하거나 혹은 그 신학들과 결합하려는 어떤 만남이나 평가는 없다. 여기서는 다음과 같이 제시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우리가 소개하려는 신학은 "개신교신학"이다. "개신교적" 혹은 "복음적"이라는 두 가지의 의미를 지닌 "evangelisch"라는 독일어 형용사는 신약성서와 16세기 종교개혁을 생각나게 한다. 그래서 여기서 전개될 '개신교(복음적)신학'과 관련해 다음 두 가지가 고백된다. 첫째, 그 신학의 근원은 먼저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 은폐되어 있었다가 신약성서의 저자들, 사도들, 예언자들의 문서 안에서 명확하고 밝게 드러났다. 둘째, 그 근원은[각주:1] 그 후 16세기의 종교개혁에서 재발견되고 재수용되었다. 그러므로 "개신교적"(복음적)이라는 표현은 어느 한 교파만을 배타적으로 지칭할 수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 왜냐하면 그 표현은 모든 교단이 어떤 방식으로든 존중하는 성서를 우선적·결정적으로 가리키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프로테스탄트 신학"이 복음적인 개신교신학인 것은 아니다. 또한 로마교회의 영역에도, 동방 정교회의 영역에도, 그리고 종교개혁적 새 명제가 변주되고 더 나아가 변질된 훨씬 후대의 영역에도 복음적 신학은 존재할 수 있다. 여기서 내적으로 "보편적"(가톨릭적)이라는 의미는 "복음적"(개신교적)이라는 의미와 함께 모든 신학들의 연속성과 통일성을 가리킬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공의회적'이 아니라 '교회일치적'이라는 의미에서 그러하다.[각주:2] 이제 우리의 "개신교신학"을 다른 많은 종류의 신학들 한가운데서 그것들로부터 (아직 어떤 확정적인 가치판단은 없이) 구분하는 것은 다음에 달려 있다. 개신교신학은 복음의 하나님을, 즉 복음 안에서 스스로를 알리시고 인간에게 말씀하시며 인간들 사이에서 인간에게 행동하시는 하나님을 (바로 그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방법에 의해!) 인지하고 이해하고 언어로 표현한다. 바로 그 하나님이 인간적 학문의 대상이 되시는 곳, 바로 그분이 그 신학의 근원과 규범이 되시는 사건이 발생하는 곳, 그곳에 개신교신학은 존재한다. 

몇몇 부분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 '복음적 신학(die evangelische Theologie)'이라는 번역어를 일관적으로 사용하면서 직역에 가깝게 옮겨보았다.

그래서 거리를 두려거나 혹은 결합하려는 비교와 평가 없이, 다음의 한마디면 충분할 것이다. 여기서 소개될 신학은 복음적 신학(die evangelische Theologie)이다. 복음적(evangelisch)이라는 형용사는 신약 성서와 16세기 종교 개혁을 동시에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두가지 고백이 성립하는데, 여기서 다뤄질 신학이 이스라엘 역사의 문서 속에 감춰진 뿌리로부터 먼저 신약 성서의 복음사가, 사도들, 예언자들의 기록에서 분명하게 나타난 신학이며, 그 후 16세기 개혁 속에서 새롭게 발견되고 받아들여진 신학이라는 것이다. 이 표현은 (우선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 표현이 모든 교파에서 어떻게든 존중하는 성서를 지칭한다는 사실 때문에라도) 교파를 구분하는 의미로 쓰일 수 없고, 그렇게 쓰여서도 안되며, 그렇게 이해될 수도 없고, 그렇게 이해되어서도 안된다. 모든 "프로테스탄트" 신학이 복음적 신학인 것은 아니다. 로마 교회나 동방 정교회의 권역에서, 또한 종교개혁적 새 출발에서 발생한 많은 후대의 변형들과, 나아가 변종들의 영역까지에서도 복음적 신학은 존재한다. "복음적"이라는 말은 여기서 객관적으로 이 신학의 모든 보편적, ("공의회적"은 말할 필요도 없고) 교회일치적 연속성통일성을 지칭하는 것으로 사용되어야 하며, 그러한 모든 수 많은 신학들의 중심에서, 또한 (가치판단을 내리지 않고) 이 신학들과 다르게 복음하나님을, 즉 복음 안에서 자신을 알리시고, 스스로 인간에게 말씀하시며, 인간들 속에서나 인간들 곁에서 행동하시는 하나님을, 그분이 스스로 지시하시는 길로 받아들이고 이해하며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이 신학 속에서 하려는 것이다. 그분께서 인간적 학문의 근원으로나 규범으로나 그 학문의 대상이 되시는 일이 발생하는 곳, 그곳에 복음적 신학이 있다. 

바로 이 대목에서 바르트가 여기서 이야기하려는 신학이, 단순히 개신교라는 '교파의 신학'이 아니라, '복음의 하나님을 다루는 신학'임을 알 수 있다. "모든 개신교 신학이 복음적 신학"인 것도 아니고, 가톨릭 교회나 정교회에서도 이 '복음적 신학'은 존재한다. 

또한 바르트가 직접 서문을 쓴 미국판이 '복음주의 신학'이라고 오해될 수 있는 Evangelical Theology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을 보아도, 바르트가 evangelisch라는 단어의 '개신교적'이라는 의미보다 '복음적'이라는 의미에 무게를 더 두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새로운 번역이 나온다는 것은 반가운 일임이 틀림없다. 



개신교신학 입문

저자
칼 바르트 지음
출판사
복있는사람 | 2014-10-15 출간
카테고리
종교
책소개
칼 바르트의 마지막 명강의를 만나다! 새로운 번역과 장정으로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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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원문의 구조를 고려하면 사실 재발견되고 재수용된 것은 '근원'이라기보다 '(복음적) 신학'이라고 봐야 한다. [본문으로]
  2. um nicht zu sagen이라는 관용구가 잘못 해석된 것 같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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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에 관해서

2015.03.31 08:57 from 흐름

다시 그가 한 말을 떠올려 보자면, 


"전진이란 [...] 언제나 다시 한 번 시작부터 시작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우리가 언제 한 번이라도 제대로 시작한 적이 있던가? 우리는 지금까지도 문 앞에 서있는 것은 아닌가? 이 문이 우리에게 맞는 바로 그 문인지 아직까지도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에? 


의식은 흘러간다. 항상 시간성의 문제와 결부된다. 


글은 그 자체로는 멈춰있다. 글은 일반적으로 그 추상성*이 회화 등의 장르보다 낮은, 특수한 형태의 그림이라고 정의할 수 있지 않을까? 의식은 이 그림을 보며, 훈련된 알고리즘을 통해 해석하며, 말하자면 다시 의식화한다. 이를 나는 '읽는다'고 표현한다. 


(*Diese Abstraktheit ist schon quantifizierbar, weil wir ja empirisch messen können, wie konsequent ein Bild interpretiert wird.)


이 관점에서 글을 쓴다는 행위의 어려움은 일종의 Zeitinkonsistenz (시간-비일관성?) 문제에서 비롯된다. 의식이 문장화되었을 때, 즉 글의 형태를 가지게 되었을 때, 이미 의식은 저 너머로 흘러가 버렸다. 


생각은 다차원적이다. 여러 축의 이런저런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 보통 n>4 차원적 문제의 시각화는 일정 정보의 손실을 불가피하게 수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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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용이 따르는 투표


틸만 뵈어거스(2004). AER (94,1) p.57


투표를 할 때 비용이 들 경우, 좋은 투표 규칙은 무엇인가? 우리는 투표권자가 두 가지 선택지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경우를 두고 이 질문을 분석해 본다. 대칭적 개별가치 투표 모형에서 우리는 자발적 참여에 의한 다수결이 의무적 참여에 의한 다수결이나 임의적 의사결정보다 파레토 효율적임을 보인다. 


투표에 참여하는 것은 자발적이어야 하는가 아니면 의무적이어야 하는가? 개개인이 투표에 참여하도록 얼마나 강요해야 하는가? 이 논문은 이러한 질문을 다룬다. 이 논문의 분석은 회사, 동호회, 대학 학과 등에서 회의와 투표를 어떻게 조직해야 하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자발적 참여에 의한 투표의 효과는 최근 몇몇 투표에 관한 실증적 논문의 주제이기도 했다. Matthew Turner와 Quinn Weninger(2001)는 특정 산업에서 (Mid-Atlantic surf clam과 ocean quahog 어업) 온건한 정책을 선호하는 기업의 자발적 참여에 의한 공개 회의에 참여할 가능성이 극단적인 정책을 선호하는 기업보다 낮다는 것을 밝혀냈다. George Bulkley 등(2001)의 논문은 (참여가 재정적으로 지원되는) 영국 상원을 연구했다. 이들은 어떤 정당에 가입한 상원 의원들이 그렇지 않은 의원들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는 것을 밝혀냈다. 자발적 참여는 그래서 투표자들 사이의 자기선택을 유도한다. 따라서 이러한 선택이 어떤 면에서 효율적인지, 혹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한 질문이 제기되는데, 이것이 이 논문에서 정형화될 질문이다. 


우리가 분석하는 정책의 문제는 총선에서도 일어난다. 대부분의 국가에서 이러한 투표에 참여하는 것이 자발적인 반면, 벨기에와 이탈리아 같은 국가에서는 이를 강제적으로 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연구의 결과를 이러한 맥락에 적용하는 것이 타당한지에 대해서는 조심스럽다. 우리의 분석은 투표에 관한 게임이론적 모형에 기반해 있고, 이 모형에서 참여 결정은 합리적이며 개개인의 투표가 유의미할 확률에 의해 유도된다. 이 확률은 대부분의 투표 규칙 아래에서 투표권자가 많은 경우 0에 근접한다(하지만 실증적으로 관측된 참여율은 주로 높다). 이것이 ‘투표의 역설’이다(Anthony Downs, 1957; John Ferejohn & Morris Fiorina, 1974). 이 역설은 투표권자의 수가 많은 경우, 비용이 따르는 투표에 대한 관습적인 게임이론적 분석이 쓸모 없음을 말한다. 이와 다르게 투표권자의 수가 적은 경우에는 관측되는 투표 행태가 이성적이지 않을 이유가 없을 것이다. 이것이 우리 논문이 투표권자의 수가 적은 경우에만 의미가 있는 이유이다. 


우리의 주된 결론은 자발적 다수결이 강제적 투표보다 낫다는 것이다. 이러한 결과에 대한 직관은 간단하다. 선거를 통해 일어나는 부정적 외부효과가 있다. 누군가의 투표는 다른 투표자들의 결정이 유의미할 가능성을 낮게 만든다. 이는 다른 투표자들의 기대 효용을 감소시킨다. 투표에 참여할 것인지 결정을 내릴 때, 개개인은 투표가 그들에게 주는 이익이 무엇인지를 따지지만, 그들이 남들에게 일으킬 부정적 외부효과는 무시한다. 그렇기에 자발적 투표에 참여할 개인의 인센티브는 너무 작다기보다 너무 크다. 투표를 의무적으로 만들거나, 개개인에게 참여를 하도록 압력을 가하는 것은 체계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며 상황을 악화시킨다. 


균형점에서 투표 참여율이 너무 높다는 결론이 처음에는 놀라울 수도 있다. 대중적 토론은 어쨌거나 너무 높은 참여보다 너무 낮은 참여를 염려하는 것으로 보인다. 비슷한 맥락들을 고려해 볼 때 우리의 결론은 더욱 직관적이 된다. 예를 들어, 학과 회의에서 토론에 기여하는 평균적인 양은 과도한 것으로 보인다. 비슷하게, 사람들은 아마도 과도한 양의 시간을 집단적 결정에 영향을 주는 것을 모의하는데 사용할 것이다. 투표에의 지나친 참여라는 우리의 결론은 정치적 활동에 과잉투자하는 것과도 비슷한 사례이다. 


우리는 따라서 이 논문이 기반하고 있는 효과가 직관적으로 당연하다고 주장하지만, 이 논문의 목적이 실제로 참여율이 항상 너무 높다는 일반적인 주장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 우리는 그동안 충분히 주목을 받지 못한 어떤 특정한 효과를 떼어내는 모형을 구성해 본다. 이 모형은 하나의 벤치마크 모형으로 여겨져야 하며, 더욱 일반적인 모형들은 우리가 여기서 연구하는 효과와는 다른 방향으로 작동하는 다른 효과를 드러낸다.


우리 모형에는 오직 두 가지 집단적 선택만이 가능한데, 두 후보 가운데 한 사람을 뽑는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세 가지 이상의 대안이 있을 경우 발생하는 콩도르세 역설이라는 잘 알려진 문제를 피한다. 우리는 투표에 참여하는 비용이 개인적으로만 관찰 가능하며 양의 값을 가진다고 상정한다. 모든 투표자들이 투표에 참여하는 것은 집단 선택의 ‘질’을 극대화하지만, 투표의 비용 또한 극대화한다. 투표 없이 임의적으로 결정을 내리는 것은 집단 선택의 질을 극소화하지만, 투표의 비용 또한 극소화한다. 우리의 주된 결과는 자발적 참여에 의한 투표가 강제된 참여나 투표 없는 임의적 의사 결정보다 낫다는 것이다. 


우리의 분석은 개별가치 투표 모형에 기반하고 있으며, 여기서 선호는 개개인의 독특한 기호를 반영한다. 개개인이 동일한 기호를 가지지만, 서로 다른 정보를 가지는 공통가치 투표 모형(예를 들어, Timothy Feddersen과 Wolfgang Pesendorfer, 1996)에서는 우리가 발견하는 부정적 외부효과를 감쇄하거나 이를 뛰어넘는 긍정적 외부효과가 있을 것이다. 이 긍정적 외부효과는 바로 투표를 하는 이들이 모두를 위해서 집단적 선택이 기반한 정보를 개선시킨다는 것이다. 또한, 이 논문의 초판에 대한 반응으로 Sayatan Ghosal과 Ben Lockwood(2003)는 공통가치 모형에서 이 논문이 주목하는 부정적 내부효과가 존재하지만 긍정적 정보 외부효과에 의해 부분적으로 상쇄된다는 것을 입증하였다. 이는 그들의 모형에서 균형 참여율에서부터 시작하여 참여율의 작은 증가가 언제나 후생 증가를 일으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주된 결과의 증명이 보이듯, 우리의 모형에서는 이것과 반대되는 현상이 일어난다. Ghosal과 Lockwood는 계속해서 몇 가지 경우에 우리의 결과와 반대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보인다. 즉 의무적 투표가 자발적 투표보다 낫다는 것이다. 이들은 또한 이들의 결과를 투표자의 효용에 개별적 가치를 지닌 요소가 포함되지만, 이것이 상대적으로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크지는 않은 경우로 확장시킨다. 역으로 이 개별가치 요소의 상대적 비중이 충분히 클 경우 우리의 결과가 계속해서 타당하다는 것을 보이는 것은 쉽다. 


우리의 모형은 선택지에 대해서나 개개인에 대해서나 대칭적이다. 선택지나 개개인 사이에 '사전 단계'에서 내장된 차이가 없도록 투표 규칙을 설계하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하지만 대칭성이라는 가정은 우리 모형에서 '중간 단계', 즉 개개인이 각자의 개인 정보를 받고 투표를 하기 전 단계에서도 계속 유지된다. 이는 이 중간 단계에서도 개개인은 각각의 다른 개인들이 각각의 선택지를 동등하게 선호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Jacob Goeree와 Jens Grosser(2003)는 선호가 서로 연관된, 그래서 베이스 갱신(Bayesian updating)이 다른 모든 사람들이 자신과 같은 선호를 가질 확률이 그렇지 않을 확률보다 높다고 믿도록 이끄는 모형을 연구하였다. 이 논문에서 발견되는 부정적 외부효과는 이들의 모형에서도 계속해서 존재하지만, 추가적인 긍정적 외부효과가 도입된다. 투표를 하지 않는 이들이 평균적으로 투표를 하는 이들의 참여로부터 이익을 본다는 것인데, 이는 그들의 선호가 같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그 결과, 만약 선호의 상관관계가 충분히 강하면, 균형 수준에서 참여율의 작은 증가는 유익하다. Goeree와 Grosser는 이 효과가 강제적 투표가 최적일 정도로 강한지는 논의하지 않는다. 만약 상관관계가 충분히 낮을 경우 우리의 결과는 계속해서 유효하다.[각주:1]


지금까지 설명한 것 이외에도, 이 논문은 기술적인 기여를 한다. 우리는 비용이 따르는 투표 모형에서 대칭적 균형의 유일성을 증명했다. 이 결과는 그렇게 복잡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알기로는, 이전의 논문들에서 얻어지지 않은 것이었다. Goeree와 Grosser(2003)는 이 결과를 그들의 설정으로 확장한다. Ghosal과 Lockwood(2003)는 공통가치 모형에서는 유일성이 성립하지 않음을 보였다. 


우리 모형과 이전에 논의된 대안적 체계들에서 참여 결정은 보통 최선이 아니기 때문에 최적의 투표 제도를 설계해야 하는 흥미로운 문제가 떠오른다. 이 논문의 토의 논문본(Discussion Paper)[각주:2]은 이 논문의 벤치마크 구성에 대해서 자발적 다수결보다 더 나은 투표제도가 존재하는지를 분석한다. 우리가 고려하는 세가지 제도는, 위원회에서의 투표, 현 상황에 대한 투표, 순차적 투표이다. 각각의 제도에 대해서 토의 논문은 투표자들의 형질의 분포가 특정하게 주어질 경우 이들이 자발적 다수결보다 낫다는 것을 밝혀낸다. 또한 위원회 투표와 현 상황 투표의 경우 자발적 다수결이 더 나은 분포를 발견하기도 한다.


이미 언급된 논문 이외에도 우리의 연구와 관련된 논문으로는 Thomas R. Palfrey와 Howard Rosenthal의 초기 저작(1983, 1985)과 John O. Ledyard(1981, 1984) 등이 있다. Palfrey와 Rosenthal(1983)은 각각 두 선택지를 선호하는 투표자의 수가 공통적으로 알려져 있다는 것과 투표자의 투표 비용이 동일하며 공통적으로 알려져 있다는 것을 가정한다. 이들은 여러 균형점을 발견했는데, 이 가운데에는 소수가 다수를 이길 가능성이 높은 경우도 포함되어 있다. 이들은 이러한 균형의 비효율성을 지적한다. Palfrey와 Rosenthal(1985)은 이전의 논문에서 투표 비용에 대한 불완전한 정보의 경우로 논의를 확장하지만 후생적 분석은 하지 않는다.[각주:3]


Ledyard의 두 논문의 주된 결론은 Ledyard(1984)의 정리 1인데, 이는 자발적 다수결에서 균형 투표의 후생적 최적성을 보인다. Ledyard의 모형은 그가 Downs(1957)형의 모형에 투표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두 선택지를 내재화 한다는 점에서 우리의 모형과는 다르다. 최적성 결과는 후보자들이 투표자들의 사전 후생을 최대화시키는 동일한 위치를 선택하고 투표자들은 아무도 투표하지 않는 균형점에 적용된다. 우리는 후보자들의 위치를 내생화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면에서 Ledyard보다 더 강한 최적성을 찾고 있다.[각주:4]


Martin Osborne 등(2000)은 집단적 선택 과정에의 참여가 비용을 수반하며 선택지의 집합이 어떤 유클리드 공간의 어떤 볼록한 부분집합인 모형을 다룬다. 이들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집단적 결정이 이루어지는 지를 구성하는 대신, 집단적 결정을 참여하는 모든 개인의 위치의 함수로 서술하는 (예를 들어 중앙값과 같은) “절충 함수”를 가지고 연구한다. 투표 제도가 참여 결정에 어떠한 영향을 주는지에 대한 우리의 질문은 여러 다른 절충 함수들이 참여에 어떠한 영향을 주는지에 대한 질문에 대응한다. 이들은 하지만 이 질문을 다루지는 않는다. 이들의 주된 관심사는 주어진 절충 함수에 대해서 균형점의 특징을 밝히는 것이다.[각주:5]


  1. Colin Campbell(1999)은 이와 비슷하지만, Goeree와 Grosser와는 다르게 투표 비용의 분포가 (혹은 이와 동등하게, 다른 선택지에 비한 한 선택지에 대한 선호 강도의 분포가) 투표자가 선호하는 선택지에 달린 모형을 연구하였다. 그는 충분히 큰 인구가 주어졌을 때 투표자들 사이에서 선호될 확률이 낮은 선택지가 다수결에서 승리하는 조건을 구축하였다. 그는 이것이 경제적 후생의 관점에서 바람직하지 않음을 지적하였다. [본문으로]
  2. 요청에 의해 저자로부터 얻을 수 있음. [본문으로]
  3. 선호에 대한 불완전한 정보의 경우는 Palfrey와 Rosenthal(1985)에 언급되어 있으나 투표권자가 많은 경우의 참여율에 대해서만 결론을 제시하고 있다. Palfrey와 Rosenthal의 연구는 우리가 각주 1에서 언급한 Campbell(1999)의 논문의 효시이다. [본문으로]
  4. Ledyard의 결과 또한 “많은” 투표자라는 가정에 근거한다. 위에서 설명한 이유로 인해 우리는 이 경우를 다루는 것을 주저한다. [본문으로]
  5. Bulkley 등(2001)은 Osborne 등(2000)의 모형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모형을 분석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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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편들

2015.01.04 06:30 from 흐름

(0) 이 글은 왜 쓸까? 나는 우리 모두가 예술가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삶으로 저마다의 예술을 펼치는 그런.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예술가”들에게 그림은 왜 그리는지, 음악은 왜 연주하는지, 연기는 왜 하고, 이야기는 왜 지어내는지 묻는다면 그들은 뭐라고 대답할까?

지금 나에게 글은 왜 쓰냐는 질문은 그런 질문들과 과연 동치의 관계에 있는 것일까? 차라리 그들에게 TV는 왜 보고, 친구들과 메시지는 왜 주고 받고, 신문 기사는 왜 읽고 있냐고 묻는 질문과 같은 차원의 것이라고 하는 쪽이 더 그럴듯하지는 않을까?

어떻게 보면 대답할 필요가 있을까 싶은, 대답하기 귀찮은 질문들, 평소라면 하지 않을 그런 질문들을 계속 하고 있다. 왜 한국에는 빅맥 세트가 3유로 정도 밖에 안하는가? 왜 독일에는 상하이 스파이스 치킨버거가 없는가? 한국 버터는, 푸딩은 왜 이렇게 비싼가? 그리고 이렇게 질문하는 것은 과연 바람직한 것인가?

(1)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우리는 알게 될 것이다.” 힐베르트는 왜 그런 수학자 답지 못한 무책임한 명제를 남겼을까? 본회퍼의 삶과 신학을 떨어트려서 보는 것은 가능한가? 그게 좋은 일인가? 누가복음서의 저자는 과연 바울서신에 언급되는, 골로새서가 말하는 “의사 누가”인가? 그렇게 믿는 것이 좋은 것인가? 예배당에서 제단이 사라진 이유와 강단 뒤의 십자가가 스크린으로 덮힌 이유는 서로 충돌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1a) 사실의 판단은 그 옳고 그름을 누구에게 묻든 같은 대답을 들어야 하는 문제다. 현대의 학문은 대부분 이 문제를 놓고 씨름한다. 많은 사람들이 어떤 학문을 놓고 과학인가 아닌가를 정의할 때, 이 문제를 다루는지 아닌지를 본다. 나는 누가복음이라는 문서를 쓴 사람이 골로새서의 “의사 누가”라고 굳이 믿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성서는 이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누가복음서, 사도행전 어디에서도 저자의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단지, 이레네우스 이래로 그렇게 추측해온 이론이 교회의 전통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회의적으로 사고하고, 종교에 일반적으로 비판적인 이들은, 교회가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누가복음의 저자는 의심할 여지 없이 누가”라는 가르침을 줄 때, 이것을 도그마라고 부르며 공격한다. 종교의 문제에 대해서 “왜?” 라고 질문하는것, 그리고 그 “왜?”에 답하는 것, 이것이 불가능하다고 보기에, 소통의 가능성이 없다고 보기에 교회를 비판한다. 소통가능성이 사라질 때, 그 문제는 공적인 영역이 아니라 사적인 영역으로 남는다.

헤르만 바빙크는 “어떻게 아는가?”라는 질문에 “‘성령이 알려주신다’는 것 이상으로는 알 필요도 없고 알려고 해서도 안된다”고 했다고 한다. 하나님의 권위에 의지하고 맡기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문제에 그러한 답변으로 일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존 스토트의 책을 읽다가 그가 인용한, 작년에 작고한 판넨베르크의 글귀가 마음에 들었다.

“설득력이 없는 메시지가 단지 성령에 의존한다고 하여 설득력을 얻을 수는 없다… 기독교 메시지의 설득력은 그 내용으로부터만 나올 수 있다. 내용이 없을 경우 성령에의 의존이 전파자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논증과 성령의 역사는 상호경쟁적인 것이 아니다. 바울은 성령에 의존하면서도 생각과 논증을 아끼지 않았다.”

“정말로 그러한가?”, “왜 그러한가?”라는 논증의 가장 밑바닥에는 의심이 있다. 의심을 단순히 믿지 않는 것이라고 얕게 치부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의심이라는 소금 없이 굳건한 믿음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더욱 치열하게 싸워야 한다. 더욱 겸손하고 엄격해져야 한다. 그래서 그 질문들을 뛰어 넘어야한다.

(1b) 하지만 신앙이란 어쩐지 교회 밖에서만 사적인 문제로 여겨지지 않는다. 성서에 쓰여진 “말씀(Logos)”이라는 단어는 아무런 의심 없이 “기록된 말씀(Scripture)”과 동치의 관계로 받아들여진다. 그리고 이를 통해 말씀은 “함께 듣는 것”에서 “스스로 읽는 것”으로 그 무게가 옮겨져 갔다.

듣는 것과 읽는 것 사이에는 질적인 차이가 있다. 바울은 믿음이 들음에서 난다고 했다. 순수한 들음은 인격적인 경험이다. 듣기 위해서는 화자와 청자가 시공을 공유해야 한다. 그들이 같은 때와 같은 곳에 있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부버의 개념을 어쭙잖게 조금 빌려오자면, 듣는 것은 “나와 너(Ich und Du)”의 관계에서만 가능하다.

하지만 세상이 변한 것은 사실이다. 사람들은 늘 대체재를 개발해왔다. 그림, 글, 녹음기, 카메라, … 하지만 어떤것도 “들음”이 가지고 있는 본래의 모습(Substantiality)을 완전하게 대체할 수는 없다. 이것들은 “나와 그것(Ich und Es)”의 관계일 뿐이다. 혼자 끙끙거리며 이사야서를 읽던 에티오피아 내시의 마음을 흔들어 놓은 것은 빌립이 전했던 어떤 정보 때문만이 아니라, 그와의 만남이고, 그를 통한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이라고 생각한다.

들음은 본질적으로 수동적이다. 누군가에게 의지해야 하는 일이다. 내가 보기 싫고, 읽기 싫은 것은 눈 감아버리면 그만이다. 하지만 나의 귀는 닫을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들려지는 말씀”이다. 교회의 전통은 언제나 성서가 읽혀지게 해서 함께 듣는 것이었다. (Col 4:16, 1Th 5:27) 듣는 것은 내가 듣고 싶다고 해서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듣는 것은 하나님이 가능케 하시는 일이다. 하나님이 주어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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