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리아 배어: 다리 자유[각주:1]의 종말


무더위는 얼마나 짧은 옷까지도 우리 사회가 받아들일 수 있는지 많은 이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이 질문은 '학교에서의 짧은 옷 금지'라는 바보 같은 아이디어의 고전을 다시 수면 위로 띄운다.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의 한 중학교가 여학생들이 핫팬츠와 배가 드러나는 상의를 입는 것을 금지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 금지령은 남학생들에게도 적용된다. 트위터에 올라와 "‪#‎핫팬츠금지(#hotpantsverbot)‬"라는 해시태그를 통해 뜨거운 토론의 대상이 된 학교 측의 가정통신문은 남학생과 여학생 모두를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10대 남자아이가 이런 옷을 선호하는 것은 흔하지 않으므로 누구를 대상으로 한 금지인지는 분명할 것이다.


학교 측의 이러한 무리한 요구가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미 다른 곳에서 시행되고 있는 사례에 따라 바덴-뷔르템베르크에서도 옷을 잘못 입은 여자아이들은 커다란 티셔츠를 받고 이를 종일 입어야 한다. 이 티셔츠가 수치의 상징이 될지 아니면 그보다는 명예의 휘장이 될지는 책임자들이 곧 알아낼 것이다.


무감각 혹은 가벼운 흑심?


이 가정통신문에서 불쾌한 점은 그보다 여자아이들의 "매우 도발적인 의상"이라는 표현이다. 이 중학교에서 가장 높은 학년은 10학년이므로, 여기서는 10세에서 16세 사이의 여자아이들이 대상이 된다. 아이들이 의도적으로 나쁘게 옷을 입는다고 이렇게 통틀어서 질책하는 것은 어떤 부적절한 핫팬츠보다도 구역질 난다.


또한 궁금한 것은, 누가 이 청소년들의 모든 배와 다리를 도발적으로 느낄 것이냐는 것이다. 학교 측은 분명 교사들이 그럴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문제가 되는 것은 속살을 보고 다른 마음이 생기지 않도록 학교로부터 지도받아야 할 남자아이들이다. 이것은 하지만 여러 측면에서 우스꽝스럽다. 우선 남자아이들에게도 청바지를 허벅지에 걸쳐 입으면서 속옷을 드러내 보이는 패션이 있다. 여자아이들이 이러한 모습을 보고 받는 불만을 생각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두 번째로 사람들은 이 십대 아이들이 무서울 정도로 포르노 소비에 무감각해져 있다면서 계속해서 이 아이들을 질책한다. 그토록 대단한 이 남자아이들이 여자아이들의 다리를 보고 딴생각을 품을까? 허무맹랑하다. 또 세 번째는, 알려진 대로 아이들은 학교에서 교과 내용만 배우지 않는다. 학교는 청소년들이 자신을 시험해보는 곳이다. 이에는 물론 한 번쯤 부적절하게 옷을 입는 것도 포함된다. 또한, 다른 아이들이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을, 곧장 성적으로 강하게 느끼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도 포함된다. 드러난 다리가 초대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뚫어지라 쳐다보는 것조차도!) 남자들이 배우는 것은 언제라도 이르지 않다.


원문: http://www.faz.net/aktuell/gesellschaft/menschen/hotpantsverbot-das-ende-der-beinfreiheit-13689760.html




  1. '다리 자유(Beinfreiheit)'의 사전적 의미는 "차량이나 객석에서 다리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것(두덴)"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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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용이 따르는 투표


틸만 뵈어거스(2004). AER (94,1) p.57


투표를 할 때 비용이 들 경우, 좋은 투표 규칙은 무엇인가? 우리는 투표권자가 두 가지 선택지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경우를 두고 이 질문을 분석해 본다. 대칭적 개별가치 투표 모형에서 우리는 자발적 참여에 의한 다수결이 의무적 참여에 의한 다수결이나 임의적 의사결정보다 파레토 효율적임을 보인다. 


투표에 참여하는 것은 자발적이어야 하는가 아니면 의무적이어야 하는가? 개개인이 투표에 참여하도록 얼마나 강요해야 하는가? 이 논문은 이러한 질문을 다룬다. 이 논문의 분석은 회사, 동호회, 대학 학과 등에서 회의와 투표를 어떻게 조직해야 하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자발적 참여에 의한 투표의 효과는 최근 몇몇 투표에 관한 실증적 논문의 주제이기도 했다. Matthew Turner와 Quinn Weninger(2001)는 특정 산업에서 (Mid-Atlantic surf clam과 ocean quahog 어업) 온건한 정책을 선호하는 기업의 자발적 참여에 의한 공개 회의에 참여할 가능성이 극단적인 정책을 선호하는 기업보다 낮다는 것을 밝혀냈다. George Bulkley 등(2001)의 논문은 (참여가 재정적으로 지원되는) 영국 상원을 연구했다. 이들은 어떤 정당에 가입한 상원 의원들이 그렇지 않은 의원들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는 것을 밝혀냈다. 자발적 참여는 그래서 투표자들 사이의 자기선택을 유도한다. 따라서 이러한 선택이 어떤 면에서 효율적인지, 혹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한 질문이 제기되는데, 이것이 이 논문에서 정형화될 질문이다. 


우리가 분석하는 정책의 문제는 총선에서도 일어난다. 대부분의 국가에서 이러한 투표에 참여하는 것이 자발적인 반면, 벨기에와 이탈리아 같은 국가에서는 이를 강제적으로 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연구의 결과를 이러한 맥락에 적용하는 것이 타당한지에 대해서는 조심스럽다. 우리의 분석은 투표에 관한 게임이론적 모형에 기반해 있고, 이 모형에서 참여 결정은 합리적이며 개개인의 투표가 유의미할 확률에 의해 유도된다. 이 확률은 대부분의 투표 규칙 아래에서 투표권자가 많은 경우 0에 근접한다(하지만 실증적으로 관측된 참여율은 주로 높다). 이것이 ‘투표의 역설’이다(Anthony Downs, 1957; John Ferejohn & Morris Fiorina, 1974). 이 역설은 투표권자의 수가 많은 경우, 비용이 따르는 투표에 대한 관습적인 게임이론적 분석이 쓸모 없음을 말한다. 이와 다르게 투표권자의 수가 적은 경우에는 관측되는 투표 행태가 이성적이지 않을 이유가 없을 것이다. 이것이 우리 논문이 투표권자의 수가 적은 경우에만 의미가 있는 이유이다. 


우리의 주된 결론은 자발적 다수결이 강제적 투표보다 낫다는 것이다. 이러한 결과에 대한 직관은 간단하다. 선거를 통해 일어나는 부정적 외부효과가 있다. 누군가의 투표는 다른 투표자들의 결정이 유의미할 가능성을 낮게 만든다. 이는 다른 투표자들의 기대 효용을 감소시킨다. 투표에 참여할 것인지 결정을 내릴 때, 개개인은 투표가 그들에게 주는 이익이 무엇인지를 따지지만, 그들이 남들에게 일으킬 부정적 외부효과는 무시한다. 그렇기에 자발적 투표에 참여할 개인의 인센티브는 너무 작다기보다 너무 크다. 투표를 의무적으로 만들거나, 개개인에게 참여를 하도록 압력을 가하는 것은 체계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며 상황을 악화시킨다. 


균형점에서 투표 참여율이 너무 높다는 결론이 처음에는 놀라울 수도 있다. 대중적 토론은 어쨌거나 너무 높은 참여보다 너무 낮은 참여를 염려하는 것으로 보인다. 비슷한 맥락들을 고려해 볼 때 우리의 결론은 더욱 직관적이 된다. 예를 들어, 학과 회의에서 토론에 기여하는 평균적인 양은 과도한 것으로 보인다. 비슷하게, 사람들은 아마도 과도한 양의 시간을 집단적 결정에 영향을 주는 것을 모의하는데 사용할 것이다. 투표에의 지나친 참여라는 우리의 결론은 정치적 활동에 과잉투자하는 것과도 비슷한 사례이다. 


우리는 따라서 이 논문이 기반하고 있는 효과가 직관적으로 당연하다고 주장하지만, 이 논문의 목적이 실제로 참여율이 항상 너무 높다는 일반적인 주장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 우리는 그동안 충분히 주목을 받지 못한 어떤 특정한 효과를 떼어내는 모형을 구성해 본다. 이 모형은 하나의 벤치마크 모형으로 여겨져야 하며, 더욱 일반적인 모형들은 우리가 여기서 연구하는 효과와는 다른 방향으로 작동하는 다른 효과를 드러낸다.


우리 모형에는 오직 두 가지 집단적 선택만이 가능한데, 두 후보 가운데 한 사람을 뽑는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세 가지 이상의 대안이 있을 경우 발생하는 콩도르세 역설이라는 잘 알려진 문제를 피한다. 우리는 투표에 참여하는 비용이 개인적으로만 관찰 가능하며 양의 값을 가진다고 상정한다. 모든 투표자들이 투표에 참여하는 것은 집단 선택의 ‘질’을 극대화하지만, 투표의 비용 또한 극대화한다. 투표 없이 임의적으로 결정을 내리는 것은 집단 선택의 질을 극소화하지만, 투표의 비용 또한 극소화한다. 우리의 주된 결과는 자발적 참여에 의한 투표가 강제된 참여나 투표 없는 임의적 의사 결정보다 낫다는 것이다. 


우리의 분석은 개별가치 투표 모형에 기반하고 있으며, 여기서 선호는 개개인의 독특한 기호를 반영한다. 개개인이 동일한 기호를 가지지만, 서로 다른 정보를 가지는 공통가치 투표 모형(예를 들어, Timothy Feddersen과 Wolfgang Pesendorfer, 1996)에서는 우리가 발견하는 부정적 외부효과를 감쇄하거나 이를 뛰어넘는 긍정적 외부효과가 있을 것이다. 이 긍정적 외부효과는 바로 투표를 하는 이들이 모두를 위해서 집단적 선택이 기반한 정보를 개선시킨다는 것이다. 또한, 이 논문의 초판에 대한 반응으로 Sayatan Ghosal과 Ben Lockwood(2003)는 공통가치 모형에서 이 논문이 주목하는 부정적 내부효과가 존재하지만 긍정적 정보 외부효과에 의해 부분적으로 상쇄된다는 것을 입증하였다. 이는 그들의 모형에서 균형 참여율에서부터 시작하여 참여율의 작은 증가가 언제나 후생 증가를 일으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주된 결과의 증명이 보이듯, 우리의 모형에서는 이것과 반대되는 현상이 일어난다. Ghosal과 Lockwood는 계속해서 몇 가지 경우에 우리의 결과와 반대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보인다. 즉 의무적 투표가 자발적 투표보다 낫다는 것이다. 이들은 또한 이들의 결과를 투표자의 효용에 개별적 가치를 지닌 요소가 포함되지만, 이것이 상대적으로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크지는 않은 경우로 확장시킨다. 역으로 이 개별가치 요소의 상대적 비중이 충분히 클 경우 우리의 결과가 계속해서 타당하다는 것을 보이는 것은 쉽다. 


우리의 모형은 선택지에 대해서나 개개인에 대해서나 대칭적이다. 선택지나 개개인 사이에 '사전 단계'에서 내장된 차이가 없도록 투표 규칙을 설계하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하지만 대칭성이라는 가정은 우리 모형에서 '중간 단계', 즉 개개인이 각자의 개인 정보를 받고 투표를 하기 전 단계에서도 계속 유지된다. 이는 이 중간 단계에서도 개개인은 각각의 다른 개인들이 각각의 선택지를 동등하게 선호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Jacob Goeree와 Jens Grosser(2003)는 선호가 서로 연관된, 그래서 베이스 갱신(Bayesian updating)이 다른 모든 사람들이 자신과 같은 선호를 가질 확률이 그렇지 않을 확률보다 높다고 믿도록 이끄는 모형을 연구하였다. 이 논문에서 발견되는 부정적 외부효과는 이들의 모형에서도 계속해서 존재하지만, 추가적인 긍정적 외부효과가 도입된다. 투표를 하지 않는 이들이 평균적으로 투표를 하는 이들의 참여로부터 이익을 본다는 것인데, 이는 그들의 선호가 같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그 결과, 만약 선호의 상관관계가 충분히 강하면, 균형 수준에서 참여율의 작은 증가는 유익하다. Goeree와 Grosser는 이 효과가 강제적 투표가 최적일 정도로 강한지는 논의하지 않는다. 만약 상관관계가 충분히 낮을 경우 우리의 결과는 계속해서 유효하다.[각주:1]


지금까지 설명한 것 이외에도, 이 논문은 기술적인 기여를 한다. 우리는 비용이 따르는 투표 모형에서 대칭적 균형의 유일성을 증명했다. 이 결과는 그렇게 복잡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알기로는, 이전의 논문들에서 얻어지지 않은 것이었다. Goeree와 Grosser(2003)는 이 결과를 그들의 설정으로 확장한다. Ghosal과 Lockwood(2003)는 공통가치 모형에서는 유일성이 성립하지 않음을 보였다. 


우리 모형과 이전에 논의된 대안적 체계들에서 참여 결정은 보통 최선이 아니기 때문에 최적의 투표 제도를 설계해야 하는 흥미로운 문제가 떠오른다. 이 논문의 토의 논문본(Discussion Paper)[각주:2]은 이 논문의 벤치마크 구성에 대해서 자발적 다수결보다 더 나은 투표제도가 존재하는지를 분석한다. 우리가 고려하는 세가지 제도는, 위원회에서의 투표, 현 상황에 대한 투표, 순차적 투표이다. 각각의 제도에 대해서 토의 논문은 투표자들의 형질의 분포가 특정하게 주어질 경우 이들이 자발적 다수결보다 낫다는 것을 밝혀낸다. 또한 위원회 투표와 현 상황 투표의 경우 자발적 다수결이 더 나은 분포를 발견하기도 한다.


이미 언급된 논문 이외에도 우리의 연구와 관련된 논문으로는 Thomas R. Palfrey와 Howard Rosenthal의 초기 저작(1983, 1985)과 John O. Ledyard(1981, 1984) 등이 있다. Palfrey와 Rosenthal(1983)은 각각 두 선택지를 선호하는 투표자의 수가 공통적으로 알려져 있다는 것과 투표자의 투표 비용이 동일하며 공통적으로 알려져 있다는 것을 가정한다. 이들은 여러 균형점을 발견했는데, 이 가운데에는 소수가 다수를 이길 가능성이 높은 경우도 포함되어 있다. 이들은 이러한 균형의 비효율성을 지적한다. Palfrey와 Rosenthal(1985)은 이전의 논문에서 투표 비용에 대한 불완전한 정보의 경우로 논의를 확장하지만 후생적 분석은 하지 않는다.[각주:3]


Ledyard의 두 논문의 주된 결론은 Ledyard(1984)의 정리 1인데, 이는 자발적 다수결에서 균형 투표의 후생적 최적성을 보인다. Ledyard의 모형은 그가 Downs(1957)형의 모형에 투표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두 선택지를 내재화 한다는 점에서 우리의 모형과는 다르다. 최적성 결과는 후보자들이 투표자들의 사전 후생을 최대화시키는 동일한 위치를 선택하고 투표자들은 아무도 투표하지 않는 균형점에 적용된다. 우리는 후보자들의 위치를 내생화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면에서 Ledyard보다 더 강한 최적성을 찾고 있다.[각주:4]


Martin Osborne 등(2000)은 집단적 선택 과정에의 참여가 비용을 수반하며 선택지의 집합이 어떤 유클리드 공간의 어떤 볼록한 부분집합인 모형을 다룬다. 이들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집단적 결정이 이루어지는 지를 구성하는 대신, 집단적 결정을 참여하는 모든 개인의 위치의 함수로 서술하는 (예를 들어 중앙값과 같은) “절충 함수”를 가지고 연구한다. 투표 제도가 참여 결정에 어떠한 영향을 주는지에 대한 우리의 질문은 여러 다른 절충 함수들이 참여에 어떠한 영향을 주는지에 대한 질문에 대응한다. 이들은 하지만 이 질문을 다루지는 않는다. 이들의 주된 관심사는 주어진 절충 함수에 대해서 균형점의 특징을 밝히는 것이다.[각주:5]


  1. Colin Campbell(1999)은 이와 비슷하지만, Goeree와 Grosser와는 다르게 투표 비용의 분포가 (혹은 이와 동등하게, 다른 선택지에 비한 한 선택지에 대한 선호 강도의 분포가) 투표자가 선호하는 선택지에 달린 모형을 연구하였다. 그는 충분히 큰 인구가 주어졌을 때 투표자들 사이에서 선호될 확률이 낮은 선택지가 다수결에서 승리하는 조건을 구축하였다. 그는 이것이 경제적 후생의 관점에서 바람직하지 않음을 지적하였다. [본문으로]
  2. 요청에 의해 저자로부터 얻을 수 있음. [본문으로]
  3. 선호에 대한 불완전한 정보의 경우는 Palfrey와 Rosenthal(1985)에 언급되어 있으나 투표권자가 많은 경우의 참여율에 대해서만 결론을 제시하고 있다. Palfrey와 Rosenthal의 연구는 우리가 각주 1에서 언급한 Campbell(1999)의 논문의 효시이다. [본문으로]
  4. Ledyard의 결과 또한 “많은” 투표자라는 가정에 근거한다. 위에서 설명한 이유로 인해 우리는 이 경우를 다루는 것을 주저한다. [본문으로]
  5. Bulkley 등(2001)은 Osborne 등(2000)의 모형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모형을 분석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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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길드에서 새로운 스타가 된 그는 우리의 일상을 떠받치는 사고구조를 단지 몇 마디로 무너뜨려버린다. 사람들은 이런 그를 존경하기도 비판하기도 한다. 베를린의 철학자 한병철과의 대화.


인터뷰어: 닐스 보잉, 안드레아스 레베어트


한 교수는 프렌츨라우어 베어크의 카페 리블링을 약속장소로 제안했다. 수줍은 많은 이 철학자는 베를린 예술대학교에서 가르치며 “피로사회”와 “투명사회”에 관한 책으로 주목을 받았다. 인터뷰는 기피하는 편이다. 


만나기로 한 시간은 십분이 지났다. 우리를 이렇게 앉혀만 두는건가? 그때 한 교수가 자전거를 타고 길에서 내려온다. 자리에 앉고 콜라 한 잔을 주문한다. 


Z: 어디서 오시는 길이시죠? 


한: 책상에서죠, 늘 그렇듯. 


Z: 어떤 일을 하시는데요? 


한: 미에 관한 책을 한 권 새로 쓰고 있어요. 보토 슈트라우스와의 인터뷰를 읽고 마음을 먹었어요. “당신에겐 무엇이 부족한가?”라는 질문에 보토 슈트라우스는 “아름다움”이라고 대답합니다. 그 이상은 말하지 않더군요. 나에게는 아름다움이 없다. 이걸 이해하고 미에 관한 책을 쓰자고 생각한거죠. 


Z: 이제 미에 대해서 깊게 생각하시는군요. 구체적으로 어떤 생각을 하시는거죠? 


한: 유사점을 찾는 겁니다. 가끔 여러가지 사건이 가진 유사점이 갑자기 보일 때가 있어요.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과 이전에 일어났던 일 사이, 혹은 동시에 일어나는 것들 사이에 말이죠. 이런 관계를 조사하는 거예요. 


Z: 그게 그래서 미와 무슨 관계가 있는거죠? 


한: 저는 요즘 일어나는 일들이나 인기있는 여러가지 사물들 사이의 연결고리를 보고 있어요. 예를 들면 브라질리언 왁싱, 제프 쿤스의 조각, 아이폰 말이죠. 


Z: 교수님은 몸에 난 털을 미는 것과 스마트폰, 그리고 예술가를 비교하시는군요? 


한: 그런데 공통점은 정말 쉽게 볼 수 있어요. 바로 매끄러운거죠. 이 매끄러움은 우리 시대를 특정짓고 있어요. 혹시 G Flex라는 LG의 스마트폰을 아세요? 이 스마트폰에는 특수한 코팅이 되어있는데요, 어딘가에 긁혀서 흠집이 나면, 금방 이 흠집이 사라져요. 그러니까 자가치유를 하는, 거의 유기체적인 피부를 가진거죠. 이 말은, 스마트폰은 항상 매끈하게 유지된다는 것이에요. 저는 스스로 물어봐요. “사물에 생기는 흠집 몇 개가 왜 나쁜거지? 매끈한 표면에 대한 갈망은 왜 일어나는거지?” 매끈한 스마트폰과 매끈한 피부와 사랑 사이의 관계가 열린거죠. 


Z: 사랑이요? 그건 왜인지 설명해주시겠어요? 


한: 스마트폰의 이 매끈한 표면은 상하지 않는 피부예요. 모든 상처로부터 벗어난 것이죠. 그리고 요즘 사람들은 사랑에서도 어떤 상처든 피하려고 하는게 사실 아닌가요? 사람들은 상처를 받으려 하지 않고 모든 상처와 상처받는 것을 기피하잖아요. 사랑을 위해서는 많은 담보가 필요한데, 사람들은 이걸 기피하려고 해요. 이걸로 상처를 받을 수 있으니까. 열정을 기피하고 사랑에 빠지는 것 자체가 이미 너무 큰 상처인거죠. 


이제는 더 이상 사랑에 빠지면 안돼요. 프랑스어로는 “tomber amoureux”라고 하겠죠. 이 빠짐이라는 것은 아주 부정적인 것이고, 이미 기피해야 할 상처가 된 거예요. 이걸 저는 또 다른 생각과 연결해 보려고 하는데요… 


우리는 “Like”의 시대에 살고 있어요. 페이스북에 “Dislike” 버튼은 없죠. 오직 “Like”만 있어요. 그리고 “Dislike”이 의사소통을 멈추게 만들 때, “Like”은 의사소통을 가속시키는 역할을 해요. 어떤 상처가 생기는 것도 의사소통을 중단시키는 거예요. 예술마저도 요즘은 상처를 입히려 하지 않아요. 제프 쿤스의 조각에는 상처가 없어요. 깨진 것도, 갈라진 것도, 잘린것도, 날카로운 모서리도, 꿰멘 것도 없어요. 모든게 부드럽고 매끄럽게 연결돼요. 모든게 둥글둥글하고, 광택이 나고, 미끈미끈하게 보여요. 제프 쿤스의 예술에서는 매끄러운 표면이 중요한거죠. 요즘은 친절의 문화가 일어나고 있잖아요, 저는 이걸 정치에도 연결할 수 있다고 봐요. 


Z: 그러니까 매끈한 정치가 일어나는 건가요? 


한: 정치도 요즘은 많은 담보를 피하려고 하죠. 친절의 정치가 일어나고 있어요. 이 친절의 표본이 되는 정치인이 누가 있을까요? 어쩌면 앙겔라 메어켈 아닐까요. 그래서 지지를 많이 받고 있잖아요. 메어켈은 분명 확실한 신념도, 이상도 없어요. 길거리를 보다가 거기에 목소리가 어떤지에 따라 자신의 의견을 바꿔버려요. 후쿠시마에 원전사고가 일어나니까 갑자기 원자력 발전에 반대를 해요. 아마 미꾸라지 같다고 할 수도 있겠네요. 요즘 우리는 정말 매끄러운 정치를 겪고 있어요. 


매끈한 피부, 매끈한 예술, 매끈한 정치 사이에는 흥미로운 관계가 있어요. 그런데 정치적 행위에는, 좀 강조하자면, 어떤 신념과 많은 담보가 필요해요. 상처를 줄 수도 있어야 하고요. 그런데 오늘날의 매끈한 정치는 그런걸 하지 않아요. 앙겔라 메어켈만이 아니라 오늘날의 정치인은 그런 걸 하지 못해요. 시스템의 친절한 하수인일 뿐인거죠. 시스템이 문제를 일으키면 수리를 하는데, 무대안성의 아름다운 광채 속에서 해요. 정치는 그런데 대안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독재랑 다를게 없잖아요. 오늘 우리는 신자유주의의 독재 속에서 살고 있어요. 신자유주의 속에서는 우리 모두가 자기 자신의 기업가이에요. 마르크스 때의 자본주의는 완전히 다른 노동구조를 가지고 있었어요. 경제는 공장주와 공장노동자로 구성되어 있었고, 어떤 공장노동자도 자기 자신의 기업가는 아니었죠. 그때는 외부의 착취가 일어났지만 지금은 스스로의 착취가 일어나고 있어요. 내가 나를 실현시킨다는 환상 속에서 내가 나를 착취하는 것이죠. 


“자유는 강제의 한 대척형이에요. ”


Z: 신자유주의를 그래서 자주 좌파의 전투구호라고 부르잖아요.


한: 그건 틀렸어요. 신자유주의가 오늘날 사회의 상태를 아주 좋다고 부르는 거죠. 이건 자유의 착취에 관한 문제이니까요. 시스템은 항상 더 생산적이기를 원해요. 그래서 외부착취에서 자기착취로 바꾼 것이죠. 이쪽이 효율성과 생산성을 더 많이 만들어내기 때문이에요, 자유라는 구실 아래에 말이죠.


Z: 교수님의 분석은 그렇게 용기를 주는 말로 들리진 않네요. 우리는 우리 자신을 착취한다. 아무런 위험도 무릅쓰려 하지 않는다. 그게 사랑이든, 정치이든. 우리는 상처를 받으려고도 주려고도 하지 않는다.


한: 안타깝지만, 그게 사실인걸요.


Z: 어떻게 하면 이 사회의 개개인이 자신의 행복을 찾을 수 있나요? 우리가 더 우리의 이상향을 위해서 노력해야 하나요?


한: 시스템은 그걸 어렵게 만들어요.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조차도 모르잖아요. 내가 나의 욕구라고 받아들이는 그 욕구는 나의 욕구가 아니에요. 의류 할인점 프라이마크를 보세요. 사람들은 같이 카풀해서 갈 사람을 찾아요. 프라이마크가 어느 도시에나 있는 건 아니니까요. 그래서 도착을 하면 매장을 거의 약탈을 해요. 얼마 전에 어느 신문 기사에 보니까 어떤 여자아이 이야기가 나오더군요. 프라이마크가 알렉산더광장에 있는 C&A 옆에 들어선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기뻐서 소리를 지르면서 말했다는 거예요. 프라이마크가 여기에 생기면 자기 삶은 완벽하다고. 이 삶이 과연 정말 이 아이를 위한 완벽한 삶인 걸까요 아니면 이 소비문화가 만들어낸 환상일까요? 여기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정확히 보기로 하죠. 이 아이가 수백 벌의 옷을 삽니다. 옷 한 벌당 어쩌면 5유로쯤 해요. 이것만으로도 사실 미친 것이죠. 이런 옷 때문에 방글라데시 같은 나라에는 의류공장이 무너지면 사람들이 죽어가거든요. 아이들은 그래서 수백 벌의 옷을 사는데, 한 벌도 입지는 않아요. 이걸로 무얼 하는지 아세요?


Z: 유튜브에 홀 비디오(Haul video)를 올려서 보여주겠죠.


한: 정확해요. 그걸로 광고를 해요! 동영상을 엄청나게 찍어대면서, 거기서 자기가 산 옷을 선전하고 모델을 해요. 유튜브에 올려진 동영상마다 조회 수가 50만 회가 넘어요. 소비자들은 옷이나 다른 물건을 사는데, 정작 필요하지는 않아요. 그게 아니라 광고를 만들고 이 광고가 새로운 소비를 만들어내요. 이 말은, 사물의 필요와는 분리된 절대적인 소비가 일어났다는 거죠. 기업은 광고를 소비자에게 위임하고 스스로 광고를 만들지는 않아요. 완벽한 시스템이죠.


Z: 우리는 여기에 저항해야 하나요?


한: 프라이마크가 오고 내 삶이 완벽해지는데, 무슨 이유로 거기에 저항할까요?


Z: “자유는 하나의 에피소드가 되어있을 것”이라고 교수님의 신간 “심리정치”에 쓰셨더군요. 왜죠?


한: 자유는 강제의 한 대척형이에요.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종속된 강제를 자유라고 느낄 때, 바로 이때가 자유의 종말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위기를 겪고 있는 것이죠. 자유의 위기는 우리가 이 강제를 자유라고 느낀다는 점에 있어요. 여기엔 저항이 불가능하죠. 기자님이 제게 무언가를 강제하면, 저는 이런 외부적 강제에 대해서 저를 방어할 수 있어요. 그런데 나에게 무언가를 강제하는 상대방이 없으면, 이때 저항은 불가능해요. 그래서 제 책에 처음에 언급한 모토가 이거예요. “Protect me from what I want.” 예술가 제니 홀저의 유명한 말이죠.


Z: 우리는 그래서 우리를 우리 자신으로부터 지켜내야 하는 것이군요?


한: 어떤 시스템이 자유를 공격할 때, 저는 저를 지켜야 해요. 비열한 것은 그런데 이 체계가 요즘은 자유를 공격하지 않고 도구화한다는 점이에요. 예를 들면, 80년대에 호구조사를 할 때는 모두가 저항했었죠. 어느 관청에는 폭탄이 폭발하기까지 했어요. 사람들은 거리로 나갔어요. 사람들의 의지에 반해서 이들의 정보를 캐내 오려던 국가라는 적이 있었으니까요. 요즘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우리에 대한 정보를 많이 넘겨 주고 있어요. 왜 여기에는 저항이 없을까요? 우리가 그때와는 다르게 자유롭다고 느끼기 때문이에요. 그때의 사람들은 자신의 자유가 침해받고 제한된다고 느꼈었죠. 그래서 거리로 나간 것이고요. 오늘 우리는 자유롭다고 느껴요. 우리는 우리의 정보를 자발적으로 내줘요.


Z: 어쩌면 스마트폰이 우리가 가고자 하는 곳으로 가는 데 도움을 줄 수도 있기에 그렇겠죠. 우리는 손해보다는 이익이 더 크다고 평가하니까요.


한: 그럴 수도 있겠죠. 그런데 구조적으로 보면 이 사회는 중세의 봉건주의와 다를 게 없어요. 우리는 농노제도 속에 있어요. 페이스북 같은 디지털 영주가 우리에게 땅을 주면서 말해요. “이 땅을 갈아. 공짜로 주는 거야.” 그리고 우리는 미친 것처럼 이 땅을 갈죠. 끝에는 땅 주인이 와서 수확을 가져가요. 이건 의사소통의 착취예요. 우리는 서로 의사소통을 하고 거기서 자유롭다고 느껴요. 땅 주인은 이 의사소통을 자본화해요. 그리고 정보기관은 이걸 지켜보고 있죠. 이 시스템은 극단적으로 효율적이에요. 여기에 대한 저항은 없어요. 우리가 이 자유를 착취하는 시스템 안에서 살기 때문이에요.


“오늘날의 디지털 사회는 계급 없는 사회가 아니에요.”


Z: 교수님은 개인적으로 여기에 어떻게 대처하시나요? 


한: 저도 물론 우리가 모두 그렇듯 사람들과 연결되지 못하면 불안해져요. 저도 희생자인 겁니다. 이 모든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이 없이는 제가 교수 일을 하고 평론 일을 하는 것도 불가능해요. 모두가 묶이고 매인 거죠. 


Z: 빅 데이터 기술은 무슨 역할을 하는 거죠? 


한: 중요하죠. 빅 데이터는 감시하기 위해서만 쓰이는 게 아니라 무엇보다 인간의 행태를 조종하기 위해 쓰이니까요. 그리고 인간의 행태가 조종될 때, 우리가 자유롭다고 느끼면서 내리는 의사 결정이 완전히 조작될 때는, 우리의 자유 의지가 위험에 처한 겁니다. 그러니까 빅 데이터가 우리의 자유 의지를 위태롭게 하는 거죠. 


Z: 교수님은 빅 데이터가 새로운 계급사회의 출현을 유도한다고 쓰셨는데요. 


한: 오늘날의 디지털 사회는 계급 없는 사회가 아니에요. 데이터 회사 액시엄(Acxiom)을 보세요. 사람을 여러 카테고리로 분류하는데, 마지막 카테고리는 “Waste”, 즉 쓰레기라고 부릅니다. 액시엄은 3억 명 정도, 그러니까 거의 모든 미국 시민의 정보를 다루는데요, 어느새 미국 시민에 대해서는 FBI보다, 그리고 어쩌면 NSA보다 더 잘 알고 있어요. 액시엄에서는 사람들을 70개의 카테고리로 나눠서 카탈로그에 무슨 상품처럼 내놓아요. 그리고 필요한 게 뭐든, 살 수 있는 게 항상 있어요. 시장 가치가 높은 소비자는 “Shooting Stars”라는 그룹에 있죠. 26세에서 45세 사이의 활동적이고, 일찍 일어나서 조깅을 하러 가는데, 아이는 없지만, 결혼은 했을 수도 있고, 비건 생활을 하면서 여행도 즐겨 하는, 그리고 TV 드라마 사인필드(Seinfeld)를 보는, 그런 사람들이에요. 이렇게 빅 데이터는 새로운 디지털 계급사회가 일어나게 하는 거죠. 


Z: 그러면 “Waste” 급에 속한 사람은 누구죠? 


한: 점수가 낮은 사람들이죠. 예를 들어서 이 사람들은 대출을 못 받아요. 그리고 이렇게 제레미 벤담의 이상적인 감옥인 판옵티콘 옆에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이 말한 “반옵티콘”이 들어섭니다. 판옵티콘이 감금된 ‘시스템의 수감자’를 감시한다면, 반옵티콘은 시스템에서 떨어지거나 시스템에 적대적인 사람들을 놓고, 원하지 않는다고 구분하고 배제해버리는 하나의 장치(dispositif)예요. 고전적인 판옵티콘이 훈육을 위한 것이라면 반옵티콘은 그보다 시스템의 안전과 효율성을 위한 것인데요, 흥미로운 점은 NSA와 액시엄이 같이 일한다는 거죠. 그러니까 정보기관과 시장이 말이에요. 


Z: “Waste” 계급이 언젠가 이런 통제사회가 다룰 수 없을 정도로 큰 규모에 다다르는 것도 떠올려 볼 수 있을까요? 


한: 아뇨. 이 사람들은 숨어버리고 부끄러워해요. “하르처(Hartzer)”가 그 예입니다(역주:  하르츠 개혁에 의한 실업급여를 받는 수급자를 무시하며 일컫는 말). 이 사람들은 계속 두려움에 빠져있어요. 여기 이 사람들이 어떤 두려움 속에서 사는지를 보면, 정말 미친 일이에요. 이 반옵티콘에 묶여서 두려움의 감옥에서 빠져나오지를 못해요. 저도 하르처를 많이 알지만, 정말 쓰레기 같은 취급을 받아요.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 중 하나라는 독일에서 사람들이 찌꺼기 취급을 받고, 존엄성은 빼앗긴 채 사는 겁니다. 이 사람들은 당연히 저항하지 않아요. 부끄러워하니까요. 사회가 책임감을 느끼도록 하지는 않고, 자기 탓만 하는 거예요. 이런 계급에서 정치적 행동을 기대할 수는 없는 거죠. 


Z: 꽤 우울해지네요. 이 모든 게 어디서 끝이 날까요? 


한: 어떻게 되든, 이렇게 계속 가지는 않을 겁니다. 물질적 자원의 한계 때문에라도 말이죠. 석유는 어쩌면 50년은 버틸지도 모르겠네요. 우리는 여기 독일에서 환상 속에 살고 있어요. 우리는 생산을 거의 전부 다른 곳으로 옮겨버렸어요. 우리가 쓰는 컴퓨터, 핸드폰, 우리가 입는 옷은 중국에서 생산해요. 그런데 사막은 베이징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어요. 거긴 스모그 때문에 숨을 쉴 수가 없을 지경이고요. 제가 한국에 있을 때는 이 노란 먼지 구름이 서울까지 온 걸 경험했습니다. 미세먼지가 폐를 상하게 하니까 항상 보호 마스크를 써야 하더군요. 이런 일들이 진행되는 속도는 엄청납니다. 얼마간은 상황이 좋게 흐른다고 해도 이게 도대체 어떤 삶인가요? 아니면 요즘 사람들을 보세요. 몸에 온갖 종류의 센서를 달고 다니면서 언제나 혈압, 혈당량, 지방량을 측정해서 이 자료를 인터넷에 올리잖아요? 이런 걸 셀프 트래킹(Self-Tracking)이라고 불러요. 이 사람들은 이미 좀비예요. 알 수 없는 권력에 의해 줄에 매달려 움직이는 인형이죠. 게오르크 뷔히너가 당통의 죽음에서 말했던 것처럼요. 


이쯤에서 카페 리블링에서의 대화가 계속해서 흐름이 끊길 위험에 처했었다는 것을 언급해야겠다. 거리의 음악가들이 끊임없이 우리 탁자로 와서는 우리 녹음기에 걱정스러울 정도로 악기를 가까이 두며 흥겹게 연주해댔기 때문이다. 글렌 밀러의 히트곡들을 부르는 색소폰, 파리 분위기의 아코디언, “Que Sera” 후렴구를 부르는 보컬과 기타까지. 그래도 한 교수는 아주 집중해서 말했다. 그가 어떻게 생각을 형성해 내서, 마침내 문장이 되고, 그걸 정확하게 나란히 늘어놓는지 볼 수 있을 정도였다. 그 집중력은 이런 상황에서도 자신이 생각을 내어 놓는 대상이 아니라, 철저히 생각 그 자체를 향해 있었다. 옆에서 들리는 노랫소리도 그를 방해하지는 못했다.


“행복도 제가 추구하는 상태는 아니에요.”


Z:  한 교수님, 교수님께서는 한국에서 먼저 금속공학을 전공하셨잖아요. 어떻게 이제 막 꽃을 피우려던 금속공학자 한병철이 철학자가 되고 시스템의 신랄한 비판자가 된거죠? 


한: 저는 기술광이에요. 어릴때는 라디오나 다른 전자기기, 기계를 만들고 하는 데에 흥분해서 푹 빠져있었어요. 그래서 사실은 전자공학이나 기계공학을 전공하려고 했는데, 금속공학이 된겁니다. 그때는 진짜 기술이나 공작에 열광했었죠. 


Z: 그런데 왜 그만 두신거죠? 


한: 언제 한번 화학 약품으로 실험을 하다가 폭발이 있었거든요. 그때 흉터들이 아직도 있어요. 그땐 거의 죽거나 적어도 실명을 할 정도였어요. 


Z: 어디서 그런 건데요? 


한: 서울에 있는 저희 집에서에요. 제가 십 대 때였는데요, 하루 종일 뭘 만들고, 깎고, 납땜하고 그랬었어요. 제 서랍은 철사, 측정기, 화학약품 같은 걸로 꽉 찼었고요. 연금술사 같았던 거죠. 금속공학도 현대적인 연금술이잖아요. 근데 폭발이 있던 날 이후에는 그만뒀어요. 철사나 인두로 하는 건 아니지만, 공작은 요즘도 해요. 생각하는 것도 공작이에요. 그리고 생각하는 것도 폭발을 일으킬 수 있어요. 생각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일이죠. 어쩌면 원자폭탄보다 더 위험할지도 몰라요. 생각은 세상을 바꿀 수 있어요. 그래서 레닌도 말했잖아요. “배워라, 배워라, 또 배워라!”


Z: 사람들을 다치게 하고 싶으신가요? 


한: 그건 아니에요. 저는 우리 앞에 이미 있는 걸 서술하려고 노력하는 겁니다. 무언가 꿰뚫어 본다는 건 어려운 일이에요. 그래서 많이 보려고, 보는 걸 배우려고 노력하죠. 저는 제가 본 걸 적어 놔요. 그래도 제 책이 사람들을 다치게 할 수도 있겠죠. 저는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하지 않는 걸 보여주니까요. 자비가 없는 건, 저나 저의 분석이 아니라 세상이에요. 우리가 살고 있는, 미치고 불합리한 이 세상이요. 


Z: 교수님은 행복한 인간인가요?


한: 그런 질문은 하지 않아요. 


Z: 그런 질문은 자신에게 하지 않는다는 말인가요? 


한: 그건 사실 의미 없는 질문이에요. 행복도 제가 추구하는 상태는 아니에요. 그게 무슨 말인지 정의를 내려야 겠죠. 행복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Z: 무척 간단한 거예요. 세상에 있는 것이 좋고, 세상에 있는 것이 편안하고, 세상이 나에게 즐거움이 되고, 잠을 잘 자는 거죠. 


한: 제일 마지막 것부터 시작해보죠. 저는 잠을 잘 못 자요. 이틀 전에 철학자 빌헬름 슈미트가 왔었던 학술회가 있었는데요, 저는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말하면서 음악으로 시작했어요. ‘골트베르크 변주곡’이요. 바흐는 이 '골트베르크 변주곡'을 어떤 심한 불면증을 앓던 백작을 위해서 작곡했어요. 저는 여기에다 청중들한테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떠올리도록 했죠. 독일어로는 “오랜 시간 나는 일찍 잠이 들었다”고 번역했는데요, 프랑스어로는 이렇더라고요. "Longtemps je me suis couché de bonne heure.” Bonheur라는 말은 행복이라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제대로 번역하면 “오랜 시간 나는 행복하게 잠이 들었다”겠죠. 그래서 말했어요. 잠을 잘 자는 건, 그 사람이 좋은,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는 신호라고. 저는 그런데 수면장애가 있어요. 


Z: 잠을 잘 주무시지 못할 때는 어떻게 하시나요? 


한: 뭘 하냐고요? 그냥 누워있어요. 다른 것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보죠. 세상에 있는 것이 좋냐고요? 이 잘못된 세상에 있는 게 어떻게 좋을 수가 있나요? 있을 수 없는 일이죠. 그래서 행복하지 않은가 봐요. 저는 세상을 이해 못할 때가 많아요. 세상은 너무 불합리하게 보여요. 이런 불합리함 속에서 행복할 수는 없죠. 행복을 위해서는 그래서 환상이 많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Z: 즐거운 게 있나요? 


한: 뭐가요? 


Z: 뭐든지요! 


한: 세상이 즐겁지는 않아요. 


Z: 쿠헨 한 조각은요?


한: 쿠헨은 안 먹어요. 좋은 음식이라면 즐거울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근데 베를린이나 독일에서 음식은 좀 문제에요. 독일인들은 좋은 음식을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지 않아요. 그건 프로테스탄티즘에서 온 것 같아요. 그 감각에 대한 반감 말이죠. 아시아에서 음식은 여기랑 완전히 다른, 꽤 높은 가치가 있어요. 독일에서랑 다르게 먹는데 돈을 많이 써요. 일본을 예로 들자면, 먹는 것은 하나의 의식이고 미학이에요. 무엇보다 그 엄청난 신선함을 보세요! 냄새 좋은 쌀밥만으로도 행복할 것 같네요. 


Z: 그건 그래도 한 줌의 행복으로 들리네요. 독일에 30년이나 살고 계시잖아요. 그건 어떻게 그렇게 참으신 거죠? 


한: “참는다”고 말하고 싶진 않네요. 저는 독일에 사는 게, 여기 이 조용함이 좋아요. 서울에는 그런 게 없어요. 무엇보다 독일 말, 그 단어들이 참 좋아요. 제 책을 읽으시면 무슨 말인지 아실 거예요. 여기서는 정말 철학하기에 좋은 언어를 할 수 있어요. 그래도 저를 즐겁게 하는 것들이 여기 있긴 하네요. 음식은 별로지만, 글렌 굴드가 연주하는 바흐. 가끔 바흐를 몇 시간 동안 들을 때가 있어요. 바흐가 없이, 슈베르트의 '겨울여행' 없이, 슈만의 '시인의 사랑' 없이 독일에 지금까지 있을 수 있었을지 모르겠네요. 철학 공부를 하면서 전에는 노래를 정말 많이 불렀어요. 무엇보다 슈만이랑 슈베르트 가곡이요. 그래서 성악 수업도 많이 받았었고요. 피아노가 반주하는 '겨울여행'을 부르는 건, 정말 아름답죠… 


“언어는 오늘날 언어를 빼앗겼어요.”


Z: 그래도 아름다운 게 있네요! 교수님은 세상에 대해 좋지 않게 말씀하시는데 시간을 너무 많이 쓰시는 것 같아요. 


한: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저는 정말 제 학생들을 절망으로 빠트려요. 제가 이 모든 문제를 수업시간에 설명하거든요. 제가 지지난 시간에 오늘은 해결책에 대해서 생각해볼 거라고 하니까 몇 명은 손뼉을 치더군요. 드디어, 교수님이 이제야 우리를 이 절망에서 구해내시는구나! 


Z: 멋있네요. 해결책에 대해서는 저희도 이제 이야기해보고 싶었어요. 


한: 저는 해결책을 생각해보려고 했는데, 그러니까 그냥 다른 문제들만 이야기하고 있더군요. 


Z: 그렇군요. 무슨 문제가 또 있나요? 


한: 오늘날에는 언어가 없어요. 대신 무언성(Sprachlosigkeit)과 혼란(Ratlosigkeit)이 있죠. 언어는 오늘날 언어를 빼앗겼어요. 한편으로는 거대한 소음, 의사소통의 소음이,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엄청난 ‘말 못함’(Stummheit)이 있죠. 이 ‘말 못함’이란 것은 침묵(Schweigen)과는 다른 거예요. 침묵은 말이 많아요. 침묵은 하나의 언어죠. 고요함도 말이 많고요. 고요함도 하나의 언어가 될 수 있어요. 그런데 소음과 ‘말 못함’에는 말이 없어요. 말 없고 시끄러운 의사소통만 있는 거죠. 그건 문제예요. 요즘은 지식조차도 없고 그냥 정보만 있어요. 지식은 정보랑은 뭔가 완전히 다른 거예요. 지식과 진리는 요즘 시대에 너무 낡은 말로 들려요. 지식은 완전히 다른 시간 구조를 가지고 있기도 해요. 과거와 미래 사이에 뻗쳐 있죠. 정보의 시간성은 지금, 현재예요. 지식은 경험에 의존하고 있어요. 장인은 지식이 있죠. 오늘 우리는 딜레탕티즘의 테러와 살고 있어요. 


(역주: 독일어에서 -keit와 -heit는 영어의 -ness처럼 형용사를 명사형으로 만든다. 또한 -los는 영어의 -less처럼 앞에 나오는 단어가 없다는 의미의 형용사를 만든다. 그래서 Sprachlosigkeit는 원래 (놀라서) 말(Sprach-)이 없음(-losig-keit)을 나타내는 말이며, Ratlosigkeit는 Rat이 없다는 말인데, Rat은 충고, 조언을 뜻하는 말이어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음’ 정도의 의미이다. Stummheit와 Schweigen의 차이를 사전적으로 보면, stumm은 어원적으로 dumm(멍청함)과 연결되어 말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음(=벙어리)을 나타내는 형용사이고, schweigen은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의지로?) 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 )


Z: 학문이 하는 일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시나요? 교수님은 지식을 만들어 내는 분이 아닌가요? 


한: 오늘날의 학자들은 지식의 사회적 문맥을 반영하지 않아요. 학자들은 실증적 연구를 하죠. 모든 지식은 어떤 지배관계 안에서 일어납니다. 지배관계, 이 새로운 장치(dispositif)가 새로운 지식과 새로운 담론을 만들어내죠. 지식은 언제나 지배구조에 포함되어 있어요. 사람들은 자기가 이 힘의 마성 아래에 있다는 것도 알아채지 못한 채 그저 실증적 연구를 할 수 있죠. 이 맥락성에 대한 자각은 오늘날 일어나지 않아요. 철학마저도 실증적 학문이 될 거예요. 철학은 자신을 사회와 연관 짓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만 연관 지으려 해요. 이렇게 사회에는 눈먼 학문이 되는 거죠. 


Z: 그 말씀은 모든 학문 활동을 두고 하시는 건가요? 


한: 대충 그런 셈이죠. 요즘은 자신의 활동에 대한 비판적 성찰 없는 구글 과학이 일어나고 있어요. 인문학은 자신의 활동에 대해 비판적으로 생각해봐야 하는데, 그런 건 일어나지 않아요. 예를 들어, 요즘은 많은 사람들이 감정에 대해 연구해요. 저는 한번 이런 연구를 하는 학자에게 물어보고 싶어요. “지금 하시는 일은, 왜 하시는거죠?”라고. 이 사람들은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서 깊게 생각하지 않아요. 


Z: 뭘 제안하시는 거죠? 


한: 인문학이 어떤 사회적 연관성을 가졌는지, 그 점에 관한 거예요. 사람들은 자기 연구의 사회적 배경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고 있어야 해요. 모든 지식이 한 시스템의 권력구조에 얽혀있으니까요. 감정 연구는 오늘날 왜 그렇게 집중적으로 이루어지죠? 아마도 감정이 오늘날 생산성을 나타내기에 그렇겠죠. 감정은 제어의 수단으로 쓰여요. 누군가가 감정에 영향을 끼칠 수 있으면 인간의 행태는 어떤 무의식적인 차원에서 제어되고 조작될 거예요. 


Z: 이제는 교수님이 음모론자로 보이기 시작하네요. 더 높은 지능으로 우리가 더 나은 시스템을 만들 수 있나요? 


한: 지능(Intelligenz)은 intel-legere라는 말이죠. 즉 그 사이를 읽는 것, 구분하는 것을 말해요. 지능은 시스템 안에서의 구분을 하는 활동이에요. 지능은 새로운 시스템이나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내지 못해요. 정신은 지능과는 뭔가 완전히 다른 거죠. 저는 지능이 아주 높은 컴퓨터가 인간의 정신을 복사할 수 있다고 믿지 않아요. 사람은 정말 지능적인 기계를 만들어낼 수 있지만, 그 기계는 영원히 새로운 언어나 완전히 다른 것을 발명해내지 못할 거예요. 저는 그렇게 믿어요. 기계에는 정신이 없어요. 어떤 기계도 자신이 받아들인 것, 그 이상을 만들어 내지는 못해요. 자신이 받아들인 것 이상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 또 자신이 받아들인 것과 뭔가 완전히 다른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 바로 여기에 생명의 기적이 있는 거죠. 이게 생명이에요. 생명은 정신이고요. 생명이 기계와는 다른 것은 바로 이 점이에요. 그런데 이 생명은 모든 것이 기계적으로 될 때, 모든 것이 알고리듬에 의한 지배를 받을 때 위기에 처해요. 레이 커즈와일 같은 포스트 휴머니스트들이 떠올리는 불멸의 기계적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에요. 어쩌면 언젠가는 기술의 힘으로 불멸을 얻을 수도 있겠죠. 그걸 위해 우리는 생명을 잃을 거예요. 우리는 생명의 값으로 불멸에 이를 거예요. 


(끝)


원문: 차이트 온라인 
http://www.zeit.de/zeit-wissen/2014/05/byung-chul-han-philosophie-neoliberalism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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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디랙, 물리법칙과 신의 존재」에 덧붙여, 

폴 디랙의 그 발언은 Mehra와의 대화가 아니라 1971년에 열린 제21회 린다우 노벨상 수상자 회의에서의 한 강연에서 인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참고로 Kragh의 원문 각주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37 Unpublished lecture on "Fundamental Problems in Physics"; cf. Dirac (1971D). The quotation is transcribed from a tape recording kindly provided by the Ständiger Arbeitsausschuss für die Tagungen der Nobelpreistäger in Lindau. Behram Kursunoglu, at the University of Miami, once asked Dirac if he believed in extraterrestiral life. Dirac answered, "If we do not find life in the universe other than on earth, then I must believe in the existence of god" [Kursunoglu and Wigner (1987), xv].

Dirac (1971D). "Fundamental problems in physics." lecture given at 21st Lindau Meeting, June 28-July 2. Summarized in German by F. Stricker in Chemiker-Zeitung 95, 880-1.

다음은 Stricker가 독일어로 요약한 강연 내용의 번역입니다. 물리학이나 생물학 용어의 번역은 정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폴 A. M. 디랙 교수, 케임브리지/영국: 물리학의 근본문제

4가지 질문으로 디랙은 그의 “물리학의 근본문제”를 요약한다. 

1. 인과성은 존재하는가? 
2. 공간과 시간의 연속성은 존재하는가? 
3. 에테르는 존재하는가? 
4. 신은 존재하는가? 

디랙은 믿을 만한 답을 주지 못하는 철학적 숙고에서 답을 찾지 않고, 기본적인 방정식들과 관계를 가지는 한해서만 물리학적 숙고에서 의미를 찾는다. 

고에너지 물리학에서는 아주 작은 입자에 대한 만족할만한 답을 찾지 못하고 있는 반면, 현재 양자역학에서 사용되어지는 방정식들은 오직 작은 에너지에 제한되어서만 적용된다. 양자역학은 그래서 물리학의 기초가 될 수 없으며 양자역학을 통해 주어지는 해답들은 일시적인 성격을 가지며 더 나은 방정식이 발견되었을 때 개정되어야만 한다. 

양자역학에서는 인과성 대신 물리적 과정의 특정한 최종상태를 나타내는 확률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40년동안 양자역학이 중요한 발전을 이루지는 못하였기 때문에 인과성에 대한 옛 관념들은 다시 고려되어야 한다. 

두 번째 질문인 아주 작은 객체에서의 공간과 시간의 연속성은 양자역학과 관계가 없다. 

세 번째 질문 “에테르는 존재하는가?”: 이 질문이 전자와 전자기장에 관한 것이라는 점에 한해서, 에테르의 존재는 부정되어야 한다. - 에테르는 “아주 가볍고 가는 형태를 가진 물질[각주:1]이며 시공과 물질을 관통하는 유동체”로 여겨져 왔다. 이처럼 모호한 모습 때문에 에테르의 속도는 확률법칙에 의해 여러가지 가능한 값 중 하나를 가진다. 이로 인해 마이클슨-몰리실험에서 추론되는 이론, 즉 에테르가 가지는 특정한 속도가 상대성과 양립될 수 없다는 주장은 유효하지 않게된다. 에테르의 존재는 디랙에 의하면 양자역학의 법칙과 모순되지는 않는다. 디랙은 몇몇 소립자의 묘사를 위해 에테르가 필요할 수도 있다는 것을 배제하지 않는다.

“신은 존재하는가”라는 네 번째 질문은 아득한 옛날부터 인류의 관심을 받아왔고 신앙이나 철학에서부터 접근되어졌다. 물리학자는 이 질문을 다음의 관점들로 나눌 수 있다. 

1. 신이 있는 우주
2. 신이 없는 우주
3. 지금의 우주

우주는 물리학적 법칙, 특히 고전역학의 법칙의 지배를 받으며 이로 인해 인과성의 지배를 받는다 - 어떤 사건은 다른 사건을 전제로 한다; 한편으로는 이로 인해 신이 설 자리는 없다. 물리학의 관점에서는 그렇지만 미래가 완전히 결정되어진 것은 아니며, 이로 인해 신이 있는 우주가 완전히 배제되는 것은 아니다. 디랙은 신 존재의 질문을 우선 생명의 관점, 혹은 생명 기원의 관점에서 설명하려고 한다. 생명의 발전은 자연과학적 법칙에 의해 일어나며, 이 법칙들은 신의 존재가 없어도 상관이 없다. 근본적인 문제는 생명의 발단에 있으며, 이는 시간에 관한 질문이다. 생명본질(Lebenssubstanz)의 첫 형성이 설명되어져야 한다. 많은 이들은 단백질이나 핵산과 같은 생명에 필요한 고분자 물질의 구성 요소를 만들어 내는 수 많은 저분자 유기 물질을 원자로부터 형성하여 생명을 만들어내는 것이 어렵지 않다고 믿는다. 고분자들은 세포기관들(Zellorganen)을 조직하며, 이들의 세포와 세포복합체로의 통합은 “생명”을 만들어내게 한다. 생명이라고 여겨지는 스스로 재생산하는 중합체(sich reproduzierende, polymere Gebilde)의 생성은 무기적이고 유기적인 화합을 통해서 주로 원시해(Urozean)에서 이루어졌을 것이다.

디랙은 이 생성이 단 한 번만 이루어질 수 있었을 정도로 어려웠을 것이라고 생명 기원의 다른 가능성에 대해 응답했다. 여기에서는 긴 시간들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것이 “우연”에 의한 것이라고 하는 것은 생명의 생성에 대한 충분한 근거를 알지 못한다는 고백으로 보인다. 디랙은 이 “우연”이 1:10100의 가능성을 가질 때 생명을 만들어낸 신의 존재를 긍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1. “Materie von sehr zarter und leichter Form”. 아마 “a very light and tenuous form of matter”의 번역인듯 하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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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많은이들이 왜 그 유명한 칼 바르트가 하필 바젤의 형무소에서 정기적으로 설교했는지 물었었다. 그가 이 단상 위에서 계속해서 설교하기로 결심을 한 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나이가 들면서 깊어진 마르틴 슈바르츠와의 우정 때문만은 아니었다. 감옥 안에서 설교를 들었던 사람들이 그의 인격과 그의 신학적 업적 때문에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 아니라는 확신 때문만도 아니었다. 아마 바젤 대성당(Basler Münster)이었다면 전혀 달랐을 것이다. 그 유명한 카롤루스 마그누스(Carolus Magnus)[각주:1]의 설교를 듣기 위해 바젤의 사람들이 줄을 지었을 것이다. 하지만 칼 바르트가 이 장소를 사랑하게 된 것은 뭔가 다른 이유였다. 아버지[각주:2]께서 언제나 말씀하신 대로 예배 때의 수감자들은 깨어있고 비판적인 청자였다. 그들은 진실과 거짓을, 그대로의 진실과 꾸며진 거짓말을, 참된 위로와 썩어 비어있는 약속을 구분할 줄 알았다. 이들에게 용기를 주고 자유롭게 하며 보살피면서 현실성 있게 복음을 선포하는 것을 칼 바르트는 마치 타자가 올라서고 싶은 타석처럼 생각했다. 하지만 이것도 그가 이 바젤 형무소라는 설교지에 성실히 남았던 이유는 아니다.


예배 이외에도 칼 바르트는 기회가 되면 아버지의 휴가 때 수감자를 한 명씩 만나 영적인 문제에 관한 상담을 했었고, 이에 관해서는 편지에 담았었다. 또 매주 목요일마다 감옥에서 있었던 대화의 밤에도 참여했었다.


칼 바르트는 아버지께 이렇게 말하기를 좋아했다. "제가 목사님의 부목사(Vikar)입니다." 그리고 거꾸로 항상 마르틴 슈바르츠는 차가 없던 바르트의 가족을 위한 운전사를 자처했다.


Schwarz, Michael: Der Vikar, in: Letter from the Karl Barth-Archives Nr. 5 (2003), S.3


  1. 칼 바르트를 지칭 [본문으로]
  2. 마르틴 슈바르츠를 지칭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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