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요한복음 14장 19절
1955년 4월 10일 부활절 주일, 바젤 형무소

주, 우리 하나님! 이곳에 저희가, 주님 앞에서 함께 부활절을 기념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이날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아드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살아계신 구세주로 드러내신 날이며, 그분은 저희의 모든 죄, 저희의 모든 고통과 죽음을 떠맡으시고, 저희의 자리에서 속죄하시며, 고통당하시며, 영원히 이기시고 떨쳐 버리셨습니다.

저희는 저희의 사정이 어떤지 잘 압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저희보다도 더 잘 아십니다. 저희가 저희 자신에게서 떠나, 세상과 저희 모두를 위해 이 일을 이루신 주님을 볼 수 있는 자유를 주심에 감사를 드리며 주님께로 나아갑니다.

이제 저희가 진심으로 말하며 듣도록 하소서. 그래서 이 시간 저희를 다스리며, 움직이며, 가득 채우는 주님의 참된 말씀이 되도록 하소서, 그래서 저희 모두를 위로하며, 용기를 주며, 바른길로 이끌게 하소서, 그래서 저희의 부족한 찬양이 주님의 마음에 들도록 하소서!

이 일이 저희 가운데 일어나도록 하소서, 그뿐 아니라 도시나 시골이나 어디서든, 가까이에서나 멀리서나 일어나도록 하소서, 어디서든 오늘 사람들이 부활과 생명의 약속을 듣고 붇잡기 위해 모이는 곳에서 일어나도록 하소서! 주님의 백성을 긍휼히 보소서! 아멘.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살아 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말씀하셨고 이제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내가 살아 있다."

그분께서 말씀하신 다른 한마디를 떠올리며 이 짧은 두 마디 말씀의 설명을 시작하려 합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여 있는 자리, 거기에 내가 그들 가운데 있다." (마 18:20) 우리는 이곳에 그분의 이름으로 모였습니다. 그러니 우리들의 이름으로 모인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분을 대하는 것이 우리에게 기쁨이 되어서가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대하시는 것이 그분께 기쁨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공로로 그분께서 우리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분께 속할 수 있도록 그분께서 모든 값을 치르셨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 세상으로 오시며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마 11:28) 하고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이 부르심이 단순히 어떤 말이 아니라, 그분의 모든 삶과 죽음의 힘 있는 행동이었기 때문이며, 이 부르심과 이 행동으로 이 땅 위에 교회를 세우셨기 때문이며, 이 교회를 통해 그분께서 모든 곳에서 모든 시대 속에서 우리의 주님이시며, 목자가 되시며, 스승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곳에서 우리가 주님의 교회로 모이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그분께서는 이제 지금 여기에 우리 가운데 계시며, 증언하시며,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살고 있다." 우리가 방금 복음서를 통해 들은 것처럼, 그분께서는 무덤 속에 계시지 않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분께서 직접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다른 모든 것은 잊어버리고 이 말을 붙잡아라, 꽉 붙들어라. "내가 살아 있다!"

분명, 그분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는, 제가 여러분께 '내가 살아 있다'고 말하거나, 혹은 여러분 중 한 분이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무언가 다른 것을, 무언가 더 나은 것을 의미합니다. 그분의 삶과 비교한다면, 우리의 삶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분명, 이 모든 것은 우리의 삶에 달린 것입니다. "내가 살아 있고" 라는 말 뒤에 곧바로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는 말이 뒤따르니 말입니다. 그러니 그분께서 우리에게 "내가 살아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 삶의 구원에 관한 것이며, 즉 우리 삶이 자유롭고, 거룩하며, 의롭고, 영광스럽게 되도록 하시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두 번째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선 그것이 속해 있는 첫마디를 들어야 합니다. 완전히 다른, 너희의, 우리의 삶과는 비교할 수 없는 삶을, "내가 살아 있다!"

내가 살아 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말씀하실 때 이는 다음과 같은 말입니다. '내가 참된 인간으로서 나의 하나님의 삶을 살고 있다.' 우리는 이를 아주 진지하게, 아주 문자적으로 이해하여야 합니다. '내가 영원하며 전능한, 하늘과 땅을 창조한, 모든 삶의 근원이며 충만함인 하나님의 삶을 살고 있다.' 이것은 무슨 말입니까? 혹시 어떤 부유한 사람이 자신의 재산을 가지고 유지하며 즐기는데 몰두하듯, '내가 나의 부유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삶을, 나를 위해 가지며, 유지하고, 즐기기 위해 산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혹시 '내 삶이 얼마나 진기하고 귀중한지 너희가 감탄하도록 저 멀리서 보여주겠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혹시 '내가 너희에게 종종 자그마한 자선을 베풀겠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의 삶이란 이런 것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세토록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분 삶의 모든 나라 안에서 우리의 하나님이 되기 원하시며, 우리의 하나님이 되신, 그 하나님의 삶은 이런 것들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내가 살아 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말씀하실 때 이는 다음과 같은 말입니다. '내가 너희를 위해 하나님의 삶을 살고 있다. 내가 이 삶을 온전히 너희를 사랑하며 살고 있다. 너희 없이는 하나님의 아들로 있으려 하지 않을 것이며, 나의 이 하나님의 삶도 필요치 않다. 내가 내 삶을 아무런 의구심이나 거리낌 없이 너희를 위해 내걸며, 내놓으며, 너희를 위해 희생하며 포기하겠다. 너희의 자리를, 너희에게 주어진 그 자리를 대신하겠다. 죽임을 당해야만 하는 사형 선고자, 죄수, 수감자, 너희가 누가 되었건 (너희 가운데 몇몇만이 아니라 너희 인간 모두!) 내가 직접 그러한 사람이 되겠다. 하지만 이 일을 너희를 위해 희생한 나의 힘 있는 하나님의 삶을 통해서 너희의 보잘것없고 악한, 비참한 인간의 삶의 어둠과 혼란이, 걱정과 두려움과 의심이, 죄와 책임이 사라지도록, 바로 하나님의 삶, 내가 그 속에서 너희의 자리를 대신하는 그 삶의 힘을 통해서 씻어지도록, 그래서 너희의 죽음이 나의 하나님의 삶을 통해서 영원히 죽음에 내어지게, 파괴되게 하겠다. 이렇게, 이 희생으로, 너희를 구원하는 그 힘으로, 내가 나의 삶을, 나의 하나님의 삶을 살고 있다.'

내가 살아 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말씀하실 때 이는 다음과 같은 말입니다. '내가 참된 하나님의 아들로서 나의 인간의 삶을, 바로 연약한, 외로운, 시험받는, 치욕 속에서 죽어가는 인간의 삶을, 너희와 같은, 완연히 너희와 같은 그런 삶을 살고 있다. 어떻게? 혹시 내가 그런 인간이 되기를 저항하면서? 어쩌면 말이 없는, 옹졸한 반항으로 이제 그냥 그런 인간이 되어야만 한다고 타협하기를 시도하면서? 아니다, 그렇지 않다! 만약 그랬다면 나는 정말로 너희와 같은 인간이 되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너희의 이웃이, 너희의 형제가 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가난한 이의 이웃이, 그의 형제가 되려고 하지는 더더욱 않았을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분명 나는 오히려 그를 버리고 배신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나는 하나님의 긍휼로 사는 인간이 되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그랬다면 나는 전혀 참된 인간으로 있으려 하지 않았으며, 분명 하나님의 아들이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살아 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말씀하실 때 이는 다음과 같은 말입니다. '내가 반대하거나 저항하지 않고, 바로 너희가 가진 그 삶과 같은 나의 인간의 삶을 살고 있다. 내가 너희의, 모든 세상의 어리석음과 죄악을, 너희의 아픔 소리와 고통을 떠맡기로 받아들이는 이의 삶을 살고 있다. 내가 나에게 이 짐을 주시는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 짐을 떠안으며, 그래서 그 짐을 너희에게서 들어 올리며 이 삶을 살고 있다. 내가 내 안에서 너희 인간의 삶을 모두 변화시키며, 되돌려 놓으며, 세례를 주며 살고 있다. 멸망을 구원으로, 죄를 의로, 죽음을 생명으로 만들며 살고 있다. 그래서 내 안에서 너희가 모두 너희 자신의 것을 찾는 것이 아닌, 소망 속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새로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도록 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너희가 내 안에서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인간이 되도록 하려는 것이다. 내가 내 삶을 살고 있다. 내가 이렇게 너희를 위하여 내어 놓으며, 나의 너희와 같은 삶, 나의 인간의 삶을 살고 있다.'

그래서. 내가 살아 있다. 나의 하나님의 삶을 너희를 향한 섬김으로 희생하면서, 나의 인간의 삶을 하나님을 향한 섬김으로 내어 놓는 이로 살고 있다. 이렇게 사는 그런 분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부활절 아침 제자들에게 드러내셨습니다. 바로 이런 분으로 그분은 지금 여기에 우리 가운데에 계시며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살아 있다."

이제 이 첫 번째 것에 속해 있는 두 번째 것을 들어 봅시다.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우리가 가진 독일어 성서들은 이 말을 "너희도 살아 있어야 함이라"고 옮겨 놓았습니다. 하지만 이 말은 우리가 이 말의 성취에 부름을 받고 요구를 받는, 어떤 당위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어쩌면 살아 있고, 어쩌면 살아 있지 않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여기서 그저 어떤 기회나 제의를 받은 것이 아닙니다.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이 말은 약속입니다. 즉, 하나 뒤에 둘이 있고, A 다음 B가 오듯, 번개가 잦으면 천둥을 하듯, "내가 살아 있고"라는 말 속에서 우리의 현재로부터 이어지는 미래를 알리는 말인 것입니다. "내가 살아 있고"라는 말을 들은 이는 곧바로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는 말을 듣습니다. 이 말은 다음과 같은 말입니다. '너희의 미래가 나의 삶에서 났기 때문에, 그 미래는 너희의 죄와 책임 속이 아니라 참된 의와 영광 속에 있다. 그러니 슬픔이 아니라 기쁨 속에, 그러니 감금이 아니라 자유 안에, 그러니 죽음이 아니라 생명 속에 있다. 너희는 다른 미래가 아닌 바로 내 삶 속의 이 현재에서 난 이 미래를, 오로지 이 미래를 가진 이들이다.'

우리가 "내가 살아 있고" 라는 말과 그 뒤로 곧바로 이어지는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는 말을 들었으니, 이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설명해 드리려 합니다.

우리에게 이제 중요한 것은 바로, 그분,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삶이 우리의 현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과거도 아니고, 어제로부터 우리의 오늘을 어둡게 하는 우리의 거대한 그림자도 아닙니다. 그러니 우리 자신에게, 어쩌면 다른 이들에게까지 옳다 혹은 그르다 질책하는 그 무엇도 아니며, 그러니 세상과 그들의 고발도 우리와 우리의 맞고발도 아닙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우리를 향하신 그 마땅한 분노까지도 아니며, 하물며 우리의 그분을 향한 불평과 '어쩌면 하나님은 결국 없다'는 은밀한 생각은 당연히 아닙니다. 다르게 말씀드리자면, 오늘의 우리 자신, 혹은 오늘의 우리라고 생각하는 우리 자신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그분,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삶이 오늘이며 우리의 현재입니다. 그것은 그분의 우리를 향해 희생하신 하나님의 삶이며, 그분의 그분 안에서 내어 놓아진 우리 인간의 삶입니다. 이것이 유효하며, 이것이 중요하며, 이것이 진실입니다. 여기서부터 길이 시작되며, 여기서부터 미래를 향한 여정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바로 이 말씀이 이 현재에서 이어질 미래입니다.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이제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여정을 위해 그분께서 주시는 선물을 받고, 준비를 하고, 먹고 마시는 일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가운데 누구도 우리 자신을 도울 수는 없습니다. 아무도 우리 자신으로부터 생명을 만들어 낼 수는 없습니다. 아무도 우리 자신으로부터 무언가를 얻을 수 없습니다. 인간이 얻으려 하고 얻는 것은 언제라도 죄와 사망일 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무것도 얻으려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를 위해 이미 있는 것, 그 모든 것을 받기만 하면 될 뿐입니다. 우리 모두를 위해 모든 것이 준비되었습니다. 무질서 속에 있던 것은 모두 질서 속에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 이미 준비된 그 질서가 작동하고 유효하도록 그저 놓아두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는 우리 눈앞에 놓인 것을 그저 보기만 하면 되고, 우리에게 크고 분명하게 들리는 것을 그저 듣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손을 주머니에 넣고 주먹을 쥐는 것 대신, 그저 열고 내밀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가 어린아이였을 때처럼 이를 악물고 있는 것이 아니라, 먹고 마시기 위해 입을 열기만 하면 됩니다. 바보들처럼 뒤로 걷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걷기만 하면 됩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바로, 어쩌면 바로 지금 이 부활절 아침 우리의 마음과 정신 속에, 우리의 생각과 계획과 의견 속에 토양을 찾고 있을 확신과 진심과 환희의 이 작은 뿌리를 자라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내가 살아 있고" 하고 말씀하셨는데, 우리 가운데 어딘가에서 이런 대답이 없다는 것은 불가능하니 말입니다. "네, 주님께서 살아 계십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살아 계시니, 저도 살아 있겠습니다. 저도 살 수 있겠습니다. 저도 살아 있기 원합니다. 저를 위해 참된 하나님이신 주님께서 참된 인간이 되셨고, 저를 위해 주님께서 돌아가시고 다시 사셨고, 저를 위해 주님께서 제가 영원 무궁히 필요한 모든 것을, 정말 모든 것을 이루셨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소외감을 느끼거나, 스스로를 너무 크게 혹은 작게 생각하지 않고, 불신에 빠지지 않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우리가 모두 자신이 공동체 속에 있음을 느끼며, 스스로를 우리 주님의 삶 속에서 자비가 일어나며, 자신을 위해 이것이 그분의 부활절 아침 죽은 자 가운데 다시 살아나심으로 드러나게 되는, 그런 사람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우리가 모든 겸손과 거대한 용기를 가지고 우리 자신을 산 소망을 가지고 그분 속에서 다시 태어난 이들로 여기는 것입니다(벧전 1:3 참조). 우리는 살 것입니다.

이제 설교를 마치려 합니다. 우리는 잠시 뒤에 있을 성찬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성찬은 바로 우리가 이야기했던 것의 상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가운데 계신다는 것, 하나님께서 그 속에서 직접 우리를 위해 그분의 삶을 내어 놓으셨고 그 속에서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드린 그분 말입니다. 그리고 성찬은 우리가 그분을 우리의 시작으로 하여 우리의 미래, 우리가 살아 있을 그 미래로 출발할 수 있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이 출발을 위해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먹이시고, 마시게 하신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하나의 빵과 하나의 잔에서, 그분께서 한 분이신 것과 같이, 우리 모두를 위한 유일하신 분인 것처럼 말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저는 여러분 가운데 누구에게도 이 말을 통해서 부담을 드리거나 강요를 할 생각이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모두, 이곳에 있는 우리가 모두 함께 성찬에 참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성찬은 모두를 위해 있습니다.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분명 모두를 위해 계시듯, 우리가 모두 그분 안에서 나누어지지 않은 것처럼, 그렇지 않고 함께 하나가 되어 서로에게 형제자매이듯 말입니다. 성찬은 우리 모든 불쌍한 죄인들을 위해, 그분의 은혜로 풍족한 우리 모두를 위해 있습니다! 아멘.

 

주 우리 하나님, 하나님의 아드님이시며 우리의 형제 되신 예수 그리스도 속의 우리 아버지! 저희가 오늘 다시 말하고 들으려고 노력했던 이 모든 것이 참된 사실이기에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저희가 몇 번이고 다시 주님의 말씀의 빛 앞에 눈이 멀고 듣지 못했기에 너무나도 죄송합니다. 저희 삶 속에서 이 때문에 나타난 모든 잘못에 용서를 빕니다. 주님 없이는 저희가 언제라도 다시 헤맬 것임을 알기에, 주님께 간절히 구하오니, 주님의 성령으로 저희의 마음을 움직이시며, 깨우시며, 저희가 정신을 차리고, 겸손하며, 대담하게 하시는 것을 멈추지 마소서.

이는 저희 모두가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하는 간구가 아니라, 다른 이들, 이 집의 모든 이들을 위해서, 세상의 모든 묶인 이들을 위해서, 몸과 영혼으로 고통받고 병든 모든 이들을 위해서, 가진 것 없는 모든 이들과 고향에서 내몰린 모든 이들을 위해서, 저희가 알지 못하는, 하지만 주님께서는 아시는 비탄과 고난을 가진 모든 이들을 위해서 하는 저희의 간구입니다. 또한 저희의 가족들과 모든 부모님, 교사와 아이들, 정부와 관청, 법원에서 공직을 맡고 책임을 진 이들, 주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이들을 위해서 간절히 구합니다.

짊어져야 할 것을 받아들이도록, 올바른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말하며 실천할 수 있도록, 무엇보다 주님께서 주시는 능력 안에서 믿고 사랑하며 소망할 수 있도록 저들과 저희를 도우소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

독서: 마태복음 28장 1~1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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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에게 오늘 구주가 나셨으니
누가복음 2장 10-11절
1954년 성탄절, 바젤 형무소

사랑하는 하늘의 아버지! 우리가 오늘 아버지의 사랑하시는 아드님께서 우리를 위해 인간이 되시며 우리의 형제가 되신 것을 기뻐하기 위해 이곳에 함께 모였으니, 주님께 마음을 다해 간청합니다.

주님께서 그분 안에서 우리 모두를 위해 예비하신 은혜와 축복과 도움이 얼마나 위대한지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우리의 귀와 우리의 이해를 열어 주소서! 그래서 그분께 우리 모두의 죄의 용서가 있음을, 새로운 생명의 씨앗과 힘이 있음을, 삶과 죽음의 위로와 권고가 있음을, 모든 세계를 위한 희망이 있음을 보게 하소서! 우리에게 오신 주님의 아드님께 겸손하고 용감하게 나아갈 수 있도록 우리 안에 자유의 선한 영을 만들어주소서!

오늘 모든 그리스도의 교회와 모든 세계에서, 많은 이들이 이 축제날의 외적인 것과 허무함을 전부 뚫고 나오도록, 그리고 우리와 함께 선한 성탄절을 기념하도록 하소서. 아멘.

그리고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방금 우리는 성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황제 아우구스투스, 총독 퀴리니우스, 요셉과 마리아, 베들레헴에서 일어난 아기의 탄생을, 들판 위의 목자들과 그들에게 일어난 주님의 천사의 방문을, 하나님을 찬양하며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고 말한 하늘 군대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이 이야기를 듣고 어떻게 받아들이셨는지 알고 싶습니다.

늘 있는 일이지만, 어쩌면 몇몇 분들은 그다지 경청하지 않으셔서 이 이야기가 그냥 작은 구름이나 연기처럼 지나쳐버렸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분들을 위해 제가 다시 한 번 읽어드리기 원하십니까? 이 이야기는 두 번이든, 백번이든 다시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여기서 그만두도록 합시다.

아니면 제가 실제의 삶과는 별 관련이 없는 아름다운 동화 이야기를 했다고 믿는 분들도 혹시 몇몇 계실 수 있습니다. 사실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아름답습니까? 제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그런 분들과 논쟁을 하기 원하십니까? 논쟁은 다른 때에 한 번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그보다 더 나은 일을 해야 합니다.

어쩌면 몇몇 분들은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오래전에 지나간 소년 시절의 날들을 떠올려야 하셨을지도 모릅니다. 주일학교를 다니며 이미 이 이야기를 들었던 그때, 성탄절 나무와 사과들과 사탕들을, 그리고 그때가 얼마나 좋았는지, 그 모든 것들이 이제는 모두 지나간 것이며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임을 떠올려야 하셨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심각한 표정으로 “네, 이제 성탄절 나무와 슬픈 성탄절의 감정이 아니라 성탄의 이야기에 집중해야 합니다.”하고 대답해야 하겠습니까? 저는 그런 말도 지금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친구 여러분, 저는 우리가 이 이야기를 이렇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께 알려드리려 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며 역사책과 소설 속의 모든 이야기보다, 신문과 라디오를 통해 전해 들려오는 모든 이야기보다 더욱 중요하고 더욱 진실하며 더욱 사실적인 이야기입니다. 조금의 부주의, 조금의 불신, 조금의 성탄절 기분, 이것이 우리가, 여러분만이 아니라 분명히 저를 포함한 우리 모두가 이 이야기를 대하는 자세입니다.

주님의 천사가 와서 우리에게 소식을 전할 때까지! 주님의 천사는 아주 분명히 오늘 밤에도 거리를 지나 집집이, 그리고 바젤의 광장 위로 다녔습니다. 그 천사는 외롭고 슬픈 이들을 위해서 혹은 너무 즐겁게만, 또 어리석게만 성탄의 전야를 보낸 이들을 위해서 왔습니다. 그 천사는 또 지금 아직도 잠자고 있는 모든 이들을 위해서 혹은 충분히 잠을 자야 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왔습니다. 천사는 오늘 아침에도 바젤의 여러 예배당을 지나갈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천사가 어떻게 이 모든 사람에게 말하는지, 어떻게 그들이 그 천사의 말을 경청했는지 그리고 경청하지 않았는지 알고 싶어할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지 말고 우리 스스로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주님의 천사는 우리와 대화하며 우리가 그의 말을 듣도록 분명히 여기 우리 사이에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여러분께 그 천사가 여기에 있으며 말하고 있음을 알려드리기 위해서, 여러분과 함께 그의 말을 경청하며 그가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깊게 생각해보기 위해 여기에 있습니다.

천사, 그는 어떤 소식을 전하는 사자입니다. 여러분께 소식을 전하는 우체부라고 쉽게 생각하셔도 좋습니다. 주님의 천사는 성탄의 이야기라는 소식을 전하는 하나님의 사자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 천사가 그 소식을 전할 때, 그때는 부주의도, 불신도, 아름다운 감정들도 모두 사라져버립니다. 주님의 천사는 하나님에게서 우리에게 바로 곧장 오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난 며칠 간 어떤 한 그림을 보았습니다. 그 그림은 주님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땅으로, 마치 번개처럼 수직으로 내려오는 그림이었습니다.[각주:1] 이것은 한 그림이지만 또한 사실이기도 합니다. 주님의 천사가 그 소식을 전할 때, 번개가 치며 진리를 비출 것입니다. 주님의 영광이 그들을 비추고, 밤은 낮으로 변하였습니다.

“영원한 빛이 그곳에 들어가 세상에 새로운 광명을 전하네 그 빛은 밤 한 가운데 빛나며 우리를 빛의 자녀로 만드네”[각주:2]

이제 그 주님의 천사가 목자들에게 무엇을 말했는지, 그리고 우리에게 지금 무엇을 말하는지, 그의 이야기를 듣고 이해하려 해봅시다. “너희에게 오늘 구주가 나셨으니.” 너희에게, 오늘, 구주 이 세 단어에 모든 성탄의 소식이 들어있습니다. 이제 하나하나 그 의미를 살펴봅시다.

너희에게 오늘 구주가 나셨으니.”라고 주님의 천사는 말합니다. 이 말에 바로 우리가 들어야 할 아주 중요한 것이 담겨 있습니다.

첫째로, 베들레헴에서 이 아기가 탄생했다는 소식은, 예를 들어 여러분도 들으셨을 에티오피아의 황제가 스위스에 도착했다는 소식과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각주:3] 우리는 그가 스위스를 아주 마음에 들어 했다는 것이나, 그를 접대했던 사람들 또한 즐거워했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말을 듣고는 “이것이 나와는 무슨 상관이지? 그건 그의 일이거나 그 사람들의 일인데!”하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이 아닙니까? 주님의 천사는 하지만 베들레헴을 가리키며 말합니다 “너희에게 오늘 구주가 나셨으니.” 여러분을 위해서 하나님은 단지 하나님으로 있기 원하신 것만이 아니라, 인간이 되기 원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영광스럽게 되기 위해, 여러분을 위해서 그분은 낮아지셨습니다. 여러분을 다시 일으켜 그분 쪽으로 끌어당기려고, 여러분을 위해서 그분은 그분 자신을 스스로 희생하셨습니다. 그분께는 아무런 유익이 없는 일이었고, 그분께는 그러할 필요가 없었지만, 그분은 이 놀라운 일을 여러분을 위해서, 우리를 위해 하셨습니다. 그래서 성탄은 우리를 향하며 우리와 함께하며 우리를 위해 일어난 일입니다.

다음으로, 베들레헴에서 이 아기가 탄생했다는 소식은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우는 것들과도 다른 것입니다. 주님의 천사는 저와 같은 어떤 교수가 아니었습니다. 그 천사가 한 대학의 교수였다면 아마도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오늘 구주가 나셨으니.” 이렇게 일반적인 사람에게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생각할 것입니다. “나는 거기에 해당하지 않겠지, 그건 다른 사람들을 말하는 것일 거야.” 마치 영화관과 극장에서 우리가 아닌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 생각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주님의 천사는 하지만 목자들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말합니다. 그가 전하는 소식은 하나의 연설입니다. “너희에게 오늘 구주가 나셨으니!”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가 이 소식을 이해하였든지 못하였든지, 우리가 선하고 경건한 사람들인지 아닌지, 너희에게! 여러분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위해서 이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여러분, 성탄은 우리가 없이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일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베들레헴에서 이 아기가 탄생했다는 소식은, 마치 우리가 모두 우편물이 오면 “거기에 제 것도 있습니까?”하고 물을 때와는, 마치 우리가 편지를 받아 읽고 있을 때, 다른 한 사람이 옆에서 어깨너머로 보는 것을 싫어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서 편지를 읽기 원하며 그 편지는 사적인 일의 하나입니다. 하지만 베들레헴의 사건은 사적인 일이 아닙니다. “너희에게 오늘 구주가 나셨으니.” 주님의 천사는 여러분 개개인과 저를 가리키지만, “너희에게!”라고 말합니다. 그의 소식은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마치 형제자매들이 아버지에게서 함께 좋은 선물을 받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곳에는 가장 앞에 선 사람도 없고 마지막에 선 사람도 없으며, 우선되는 이도 없고 차별받는 이도 없습니다. 또한, 무엇보다 그곳에는 아무도 적게 받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곳에 태어난 이는, 우리 모두의 가장 맏이되는 형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의 이름으로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그래서 우리는 “제게 오늘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고 기도하지 않고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고,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우리를 악에서 구하소서!”라고 기도합니다. (마 6:9-13) 또한 그래서 성찬에 참여하는 것을 주님의 식탁에 가는 것처럼 하며 하나의 떡을 떼어 먹고, 하나의 잔을 받아 마십니다. “받아서 먹어라! 모두 마셔라!”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은 유일하며 위대한 친교, 즉 구주와의 교제이며 그래서 서로간의 교제입니다. 구주와의 교제가 없는 곳에는 서로 간의 교제도 없고, 서로 간의 교제가 없는 곳에는 구주와의 교제도 없습니다. 하나 없이는 다른 하나도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라는 주님의 천사의 말에 담긴 것이며 그 말에서 배워야 할 것입니다.

“너희에게 오늘!”이라고 주님의 천사가 말합니다. 구주께서 태어나셨을 때, 그때를 오늘이라고 말합니다. 여기 이 한밤중에 새로운 날이 열렸습니다. 그는 그때도 그날의 태양이셨고 지금 이날과 모든 날의 태양이십니다. 그 새날은 성탄의 날만이 아니라, 우리 삶의 날입니다.

오늘이라는 말이 그때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옛날의 이야기를 듣자…!”[각주:4]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천사는 오늘도 그때와 같이 목자들에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새날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간적인 상황과 관계 속에서, 우리의 삶의 역사와 세계의 역사에 새로운 시작이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어제의 슬픔과 죄와 두려움이 아직은 남아있지만, 구주께서 태어나심으로 은혜롭게 덮였다는 것을, 그래서 우리 모두에게 아무런 해를 입힐 수 없다는 것을 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용기를 내며 우리의 생각을 가다듬고 새로운 시도를 감행하며 확신을 할 수 있다는 말을 들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스스로로부터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천사가 우리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구주께서 나셨기에, 새로운 오늘이 시작되었습니다.

오늘이라는 말은 물론 “내일부터가 아니라!”는 말이며 “내일도 분명히!”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때 태어난 그분은 더는 죽지 않으시며 살아서 영원토록 다스리시는 분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내일을 예상하지 맙시다. 우리는 항상 “내일, 내일, 오늘만은 안된다네…”[각주:5]하며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제가 바젤란트 사람들에 대해 나쁘게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쪼매 기다리 보이소”[각주:6]라는 말은 위험한 말입니다. 우리가 내일도 아직 살아있겠습니까? 구주께서는 분명히 살아 계실 것이지만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그 복음을 내일도 들을 수 있을는지, 그리고 그 복음에 응답할 수 있는지는 어떻게 압니까? 그것은 우리의 손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바로 어제 예레미아스 고트헬프의 말을 접했습니다. “삶은 빛이 아니다. 빛이라면 내가 다시 불을 붙일 수 있다. 하지만 삶은 하나님의 화염이다. 그분은 단 한 번 땅 위에서 생명이 타오를 수 있게 하시고, 두 번 다시 하지 않으신다.”[각주:7] 사랑하는 친구 여러분, 지금, 오늘 여기서, 우리가 그 화염의 때를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봅시다. “오늘, 오늘, 이렇게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고 성경은 다른 곳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히 4:7)

이것이 바로 주님의 천사가 “오늘”이라고 할 때, 우리에게 말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말합니다. “너희에게 오늘 구주가!” 이것이 바로 성탄의 핵심입니다. “너희에게 오늘 구주가 나셨으니!” 이에 대해서는 많은 것을 말해야 하겠지만, 저는 지금 단지 몇 가지만을 짚어 보겠습니다.

구주라는 이름은 무엇을 말합니까? 구주께서는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그러니 우리를 돕고 치유하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원조자이시며, 해방자이시며, 구원자이십니다. 어떤 인간처럼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만 할 수 있으시며, 또 그렇게 우리를 위해 계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모든 위기에서의 해방자이시며, 원조자이시며, 구원자이십니다. 그분께서 계시지 않았다면 그 위기에서 우리가 멸망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분께서 구주로 계시기에 이제 우리는 멸망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어떤 기여도 하지 않고 관여한 것이 없어도, 또한 우리가 나중에 아무것도 계산하지 않아도, 구주께서는 우리에게 구원을 아무런 댓가 없이 은혜로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그저 우리의 손을 내밀어 그 구원을 받고 이 선물에 감사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구주께서는 모두에게 아무런 제한과 예외 없이 구원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바로 우리가 모두 그를 필요로 하고 그분께서 우리 모두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아드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 사람이 되시면서 그분은 우리 모두의 형제가 되셨습니다. “너희에게 오늘 구주가 나셨으니”하고 주님의 천사는 말합니다.

이것이 성탄의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일이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고는, 우리가 우리에게서 시선을 돌리지 않고는, 우리 스스로와 우리의 삶과 우리가 관심을 가지는 것으로부터, 우리를 괴롭히는 모든 것들로부터 시선을 돌리지 않고는, 이 모든 것을 듣지 못합니다. 그분께서, 우리의 위대하신 하나님이신 구주께서 여기에 계시며, 우리가 여기에 있습니다. 바로 그분께서 나를 위해, 우리를 위해 여기에 계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야기를 듣지 않고는, 우리와 함께 일어난 그 거대한 변화를 듣지 않고는, 우리에게 허락된 그 거대한 기쁨을 듣지 않고는, 우리의 삶 속에서 선포되는 거대한 그 부르심을 듣지 않고는, 그래서 우리가 깨어나 그분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길로 발을 내딛지 않고는, 그분의 이야기를 들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합니까? 우리가 처음에 생각했던 것처럼 부주의함과 우리의 불신, 조금 고상한 성탄절의 감정을 이어가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고 새롭게 시작하여 회심해야 하겠습니까? 주님의 천사는 아무에게도 강요하지 않습니다. 저조차도 그러한 강요는 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이 이야기를 듣기를 강요받는다면,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이야기인, 이 이야기 속에서 함께하기를 강요받는다면,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는 자유롭게 들을 수 있어야 하고 이 이야기 속에서 자유롭게 함께 참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여러분께 누가복음 2장 13절의 말씀을 읽어드리려 합니다.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이 말은 사람들이 이룬 공로는 아무것도 없지만,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사람들 가운데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천사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 땅 위에, 이곳 바젤에, 이 집 안에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행진곡을 들을 때 함께 발을 맞추며, 잘 알려진 선율을 들을 때 무의식적으로 함께 부르거나 휘파람을 부는 것처럼, 우리가 이 찬송을 듣고, 하나님께서 이 천사 한 명만을 보내신 것이 아니라 수많은 천군을 함께 보내시어 함께 찬송하게 하셨다는 설명을 들을 때는, 우리는 감동을 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분명 그럴 것입니다. 우리는 성탄의 이야기를 자유롭게 듣고 자유롭게 함께할 것입니다. 아멘.

 

주 우리 하나님! 주께서는 모든 사람 위로 위대하시며 높으시고 거룩하십니다. 그리고 주께서 우리를 잊지 않으시기에, 우리가 혼자되지 않게 하시며, 우리의 잘못과 약점들을 아심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기에 너무나도 위대하신 분이십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버지의 사랑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 안에서 아버지 자신를 우리에게 내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아버지의 은혜의 식탁에 평생토록 영원토록 손님이 될 수 있게 하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의 잘못과 실수, 우리의 걱정과 우리의 근심, 우리의 반항과 괴로움, 그리고 주께서 우리보다 더 잘 아시는, 우리의 모든 마음, 우리의 모든 삶을 주님 앞에 이제 내어 놓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구주 안에서 우리에게 내어주신 그 손안에 모든 것을 바치겠습니다. 우리의 모습 그대로 우리를 받아주소서, 우리의 약함을 위로해주소서, 주님의 채우심으로 우리의 가난함을 부하게 하소서!

또한, 주님의 자비하심이 우리 위로 빛나게 하소서, 붙잡힌 자들과 위기에 처한 자들, 병든 자들과 죽음을 맞이하는 이들 위로 빛나게 하소서. 판단해야 하는 이들에게는 정의의 영을 주소서, 세계 속에서 다스리는 자들에게는 이 땅 위에 평화를 이룰 수 있도록 주님의 지혜를 주소서. 주님의 보내심 안에서 주님의 말씀을 전해야 하는 이들에게 확신과 용기를 주소서!

구주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시며 이르신 대로 우리가 주님을 부르며 기도를 마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독서: 누가복음 2장 1-14절

성가:
Fröhlich soll mein Herze springen, P. Gerhardt
Lobt Gott, ihr Christen, allzugleich, N. Herman
Gelobet seist du, Jesu Christ, M. Luther

  1. 올덴부르크 주교 게르하르트 야코비(Gerhard Jacobi)가 볼프강 슈트리히(Wolfgang Strich)에게 의뢰하여 1954년 성탄절 기념으로 주 교회의 목사들과 개인적인 지인들에게 보낸 그림을 말한다. [본문으로]
  2. 마르틴 루터의 찬시 “예수 그리스도여 찬송을 받으소서(Gelobet seist du, Jesu Christ,1524)”의 4절. [본문으로]
  3. 에티오피아의 황제 하일레 셀라시에는 1954년 11월 25일부터 28일까지 스위스를 방문하였고 오스트리아를 방문 한 뒤 12월 1일부터 6일까지 다시 스위스를 찾았다. [본문으로]
  4. 하인리히 보스하르트(H. J. Bosshard, 1811-1877)의 “젬파흐 노래(Sempacher Lied)”의 첫 소절. 프리드리히 니글리(Fr. Niggli)의 곡과 오토 폰 그라이에어츠(O.v.Greyerz)의 가사로 된 “스위스 민요곡(Schweizerisches Volksliederspiel, op. 17)”의 한 제목이기도 하다. [본문으로]
  5. “내일, 내일, 오늘만은 안된다네 / 게으른 이들은 언제나 말한다네(Morgen, morgen, nur nicht heute / Sprechen immer faule Leute)”(격언). [본문으로]
  6. 원문에는 바젤 방언으로 “Mer wei luege!”라고 되어있다. 직역하면 “보게 될 것입니다(Wir wollen sehen).”이지만 “아니오.”라는 말의 완곡한 표현으로 “생각해 봅시다.”라는 의미라고도 볼 수 있다. 바젤란트의 비공식적인 주가(州歌)이기도 한 빌헬름 젠(Wilhelm Senn, 1845–1895)의 “바젤란트 사람들의 노래(Baselbieterlied)” 4절을 참조하라. 바젤은 1832년과 1833년에 걸쳐 바젤슈타트(도시지역)와 바젤란트(농촌지역)의 두 개의 칸톤으로 나뉘었다. 바르트가 있던 곳은 바젤슈타트이다. [본문으로]
  7. 예레미아스 고트헬프(Jeremias Gotthelf, 1797-1854)의 소설 “Wie Anne Bäbi Jowäger haushaltet und wie es ihm mit dem Doktern geht(1843/1844)” 9장 두 번째 부분. Jeremias Gotthelfs Werke in zwanzig Bänden(바젤 1949년 W. Muschg 출판) 7권 172쪽 참조.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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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용을 읽다 보면 공자가 "먹고 마시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그 맛을 아는 이는 드물구나"하고 탄식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인간의 문명이 음식 문제에서 시작한 것을 생각해 본다면, 사람이 음식을 먹는 목적이 더는 생존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 맛을 위한 것일 때, 비로소 사람이 사람답게 살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음식의 맛을 내는 데 쓰이는 가장 기본적인 양념 가운데 하나가 소금이다. 소금의 성분인 나트륨은 인간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성분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냉장고가 없던 그 시절 소금은 맛을 내는 것뿐만 아니라 음식을 장기간 저장하는데에도 꼭 필요했고, 그래서 중세 유럽에서 중요한 교역품 가운데 하나이기도 했다. 급여를 뜻하는 영어 단어 salary는 "병사들이 소금을 살 수 있도록 지급한 수당"이라는 의미인 라틴어 단어 salarium에서 온 것이다. 그가 그렇게 좋아했던 모차르트가 태어난 도시 잘츠부르크도 소금 성이라는 이름처럼, 소금 생산지였기 때문에 소금 무역이 도시의 주요 수입원이었다.

소금이 이렇게 중요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턱대고 많이 먹는 것은 물론 건강에 해롭다. 한국에서는 나트륨 중독이 사회 문제가 되어서 언론이 크게 다루는 것을 보았다. 작년 말에는 소금 중독으로 의붓딸을 숨지게 한 살인 사건도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균형을 맞추는 것. 진정으로 그 맛을 살려내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똑같은 음식을 먹으면서 누구는 영 싱겁다고 그러는데, 누구는 짜다고 난리를 부린다, 또 어떤 누구는 간이 참 잘 되었다며 맛있게 먹기도 한다. 음식의 맛을 컴퓨터로 수학 문제를 풀듯 정확하게 잴 수 있다면, 또 모두가 그렇게 느낀다면 얼마나 편리할까. 그런 것은 불가능한 것이 현실이지만 이 사회에서는 많은 사람이 자기 입맛만을 고집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나는 그래서 아직 사람들 앞에 서서 내 요리를 할 자신은 없다. 내가 한 것은 그래서 누가 아주 오래전에 만들어 놓은 요리를 해동시키고 전자레인지에 데워서(?) 양념을 좀 하는 것 밖에 안 될 것이다. 물론 그것도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닌 것 같다. 이 요리를 한 사람의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때 그 맛은 어떤 맛이었을까, 지금 그 맛을 어떻게 재현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하고, 기다리고, 또 시행착오를 겪고….

아직은 내가 요리를 할 자신이, 용기가 없다고는 했지만 여기서도 내가 고르고 양념을 했으니 어느 정도 내 입맛이 드러나기는 한다. 하지만 바라건데 내가 느낀 그 맛을 다른 사람들도 좀 느낄 수 있었으면 한다.

느릅나무길 다락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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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바르트 > 옮긴이의 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옮긴이의 말  (0) 2013.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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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함께 있던 죄인들(Die Übeltäter mit ihm)
누가복음서 23장 33절
1957년 4월 19일 성 금요일, 바젤 형무소

주 우리 하나님! 우리는 오늘 주님께서 어떻게 세상과 우리 모두를 위한 주님의 선하시고 위대하신 뜻을 이루셨는지 돌이켜보기 위해 모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의 사랑하시는 아들을 포로가 되게 하셨고, 우리가 죄 없게 하시려고 그를 죄 있다 하셨으며, 우리가 기쁘게 하시려고 그가 고통받게 하셨고, 우리가 영원히 살 수 있도록 그가 죽게 하셨습니다[각주:1].

우리 스스로는 패배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가운데 누구도 그런 구원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위대한 일을 하시려고 자비의 헤아릴 수 없는 위엄으로 우리의 죄와 우리의 고통과 사귀셨습니다[각주:2]. 우리가 이 위대한 일을 붙잡고, 움켜쥐고, 받아들이는 것 외에 어떻게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를 위해 고통받으신, 십자가에 달리신, 돌아가시고 매장되신, 하지만 다시 살아나신, 그 살아계신 구세주께서 이제 스스로 우리 가운데 오시어서, 우리의 마음과 양심에 말씀하시고, 우리를 주님의 사랑으로 갈 수 있게 하시며, 그 사랑을 굳게 믿을 수 있게, 그 사랑으로, 온전히 그 사랑으로만 살 수 있게 이끄시는 것 외에, 달리 어떻게 그 위대한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주님의 거룩하신 영의 힘으로 이 일이 일어나도록, 우리가 기도합니다. 모든 겸손으로, 하지만 모든 확신으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멘.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설교를 시작하기 전에 여러분께 부탁할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께서 성 금요일의 이야기를, 즉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의 이야기가 어떻게 네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지 스스로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가능하면 오늘, 그리고 여러 번 계속해서 반복해서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이 이야기 속에는 생각할 것과 이해해야[각주:3] 할 것이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모든 세계사가 이 안에 담겨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우리 인간과의 모든 이야기, 그리고 우리의 하나님과의 모든 이야기가, 또 이것을 바르게 이해한다면, 우리 모든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의 이야기가 담겨있습니다. 아마 여러분께 전체적인 개요만 설명하는데에도, 전체적으로 들여다 만 볼 수 있도록 한다고 해도 반 시간 이상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이 이야기에서 누가복음서 23장 33절 한 문장만 집어서 함께 보려고 합니다: 그들은 그를 십자가에 달고 그 죄인들도 함께 그렇게 하였는데, 한 사람은 그의 오른쪽에, 한 사람은 그의 왼쪽에 달았습니다.

그와 함께 있던 죄인들. 그분, 예수께서 이렇게 나쁜 사람들과 함께 계신다는 것과 이들, 이 죄인들이 이렇게 좋으신 분과 함께 있다는 것[각주:4] 가운데 무엇이 더 놀랍습니까? 어떤 것이든 상관없습니다. 둘 다 놀랍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는 확실합니다. 그들은 예수와 죄인들을, 한 사람은 오른쪽에, 한 사람은 왼쪽에, 세 사람 모두를 매달았습니다. 모두가 같이 사람들 앞의 치욕 속에서, 오랜 시간의 고통 속에서, 천천히 냉혹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때 이 두 사람도 예수처럼 어디선가 체포당하고, 감옥에 갇혔으며, 어느 재판관에게 판결을 받았습니다. 그리고는 그와 함께 십자가에 달렸고 그와의 연대 속에, 유대 속에, 언약[각주:5] 속에 있게 되었습니다. 그들을 십자가에 붙잡고 있도록 박힌 못이 빠지지 않는 것처럼, 그분과 마찬가지로 그들에게 되돌림이란 없었던 것처럼, 다만 오직 치욕적이며 고통스러운 현재와 그들에게 가까이 온 죽음의 밤만이 오직 미래에 있었던 것처럼, 이 연합은 더는 끊을 수 없었습니다. (십자가 위의 예수 그림 가운데 이 죄인들이 빠진 그림이 그렇게 많은 것은 정말 이상한 일입니다. 이 사건을 그린 그림은 차라리 그리지 않는 것이 나았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그려야 한다면, 이 좌우의 두 죄인은 언제나 빠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들이 보이지 않는 그림과 묘사에는 무언가 중요한 것이, 결정적인 것이 빠져있습니다!)

그와 함께 있던 죄인들. 이것이 무슨 말인지 아십니까? 제가 여러분께 이렇게 말할 때 너무 놀라지는 마십시오. 이것은 최초의 그리스도인 공동체[각주:6]였습니다. 확실하고, 해체될 수 없는, 파괴될 수 없는 최초의 그리스도인 공동체였습니다. 예수 가까이에 있고, 그분과 함께 있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면, 그래서 그분의 서약, 그분의 허락, 그분의 약속이 이들에게 곧바로, 직접 영향을 줄 때, 그래서 그분께서 되신 모든 것이 이들을 위한 것이며[각주:7] 그분께서 하시는 모든 것이 이들을 위한 것임을, 그래서 이들이 이 약속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을 들을 수 있다면,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는 어디든지 있습니다. 처음으로 확실했던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는 이 두 죄인이었습니다. 위태롭고, 의심이 많았던 공동체는 이전에도 이미 있었습니다. 그분과 함께 갈릴리를 지나왔고 그분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왔었던, 그분의 모든 말씀을 들었고 그분의 모든 행동을 보았던, 그분께서 부르신 제자들입니다. 하지만 겟세마네 동산에서는 어땠습니까? “이렇게 너희는 한 시간도 나와 함께 깨어 있을 수 없느냐?” (마 26:40). 네, 그들은 그렇게 할 수도 그렇게 하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분께서 홀로 깨어나 기도하실 때, 그들은 그냥 잠들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잡으러 왔을 때는 어땠습니까? “그때에 제자들은 모두, 예수를 버리고 달아났습니다.” (마 26:56) 오늘날까지 가톨릭 교회가 초대교황으로 여기는 베드로는 어떠했습니까? 대제사장의 뜰에서 한 하녀가 그를 가리키며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다"고 말했을 때, 위대한 베드로는 이렇게 부인했습니다. “여보시오, 나는 그를 모르오.” (눅 22:57) 그리고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그는 세 번이나 이렇게 예수를 모른다 하였습니다. 은돈 서른 닢에 예수를 배신한 유다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마 26:15) 그때도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는 이미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공동체는 너무나도 위태로운 모임이었습니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매달렸던 이 두 죄인은 믿음을 가지고 회개한, 거룩한 사람들이 아니었음은 물론, 아마도 그 이전에 한 번도, 어떤 것도 그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이런 것과는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완전히 그 반대였습니다! 그렇지만 그 대신 이제 그들은 그분을 홀로 두지 않았고, 잠들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때 그들은 원하든지 말든지 여러 시간 동안 십자가에 매달려 그와 함께 깨어있어야 했습니다. 그분을 둘러싼 위험한 사람들로부터 도망칠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부인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들도 분명 그의 동료로 내걸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공동체는 정말 참으로 확실한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였습니다. 그분과 그들, 그들과 그분은 결합하였습니다. 영원토록 더는 서로 떨어뜨릴 수 없었고, 지금도 그러합니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이 이 최초의 확실한 공동체에 합류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왔을 때 그들은 단지 그 뒤에 있어야만 했습니다. 골고다 위에서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달린 이 두 사람이 처음이 된 곳, 그 뒤에 말입니다.

그에게 일어난 일[각주:8]

하지만 우리가 이 두 사람으로 돌아오기 전에, 그들이 같은 모욕과 같은 고통과 같은 죽음을 맞이했던, 예수에 관해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분은 성 금요일의 주인공이셨고, 영웅이셨으며, 그분께서 이 첫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머리이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그들이 그분,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았다는 것을 듣습니다. 그들은 누구였습니까? 그들은 로마의 병정들이었고 이 사형의 집행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총독 빌라도의 명령을 받았고, 빌라도는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의 독촉을 받았습니다. 이 지도자들은 군중의 격렬한 외침으로 강한 지지를 받았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눅 23:21)

무엇이 일어났습니까? 다른 두 명에게도 일어났던, 같은 일이 우선 가시적으로 일어났습니다. 자신의 존재와 자신의 말과 행동 때문에 다른 이들에게 짜증 나고 참을 수 없는 존재가 된 한 사람이 여기서 죽임을 당했고, 힘을 잃었으며, 소멸하였습니다. 그들이 다르게 대했더라면, 그들이 그분께 이런 일을 벌이지 않았다면, 그분은 그분이 아니었을 것이고, 그들은 그들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곳에서 이렇게 예수께서는, 저 두 죄인이 특별한 이유 때문에 견뎌야 했던 것과 같은 것을, 다른 사람들도 이와 비슷하게 혹은 똑같이 견뎌야 했고 참아야 했던 것과 같은 것을, 견뎌 내어야 했습니다. 그분은 그들과 함께 그리고 그들은 그와 함께 견뎌야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주변 사람들이 더 심한 것을 당했다고, - 아마도 전쟁 중에 혹은 수용소에서 혹은 병상 위에서 - 예수께서 겪으신 것보다 더 괴로운 것을 참았어야 했다고 말합니다. 분명 타당합니다. 하지만 지금 문제는 이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일어난 것은 단지 외적이며 가시적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인간 예수의 가시적인 고통과 죽음 속에서는, 그와 함께 십자가에 달렸던 두 죄인의 고통과 죽음에서 일어나지 않았고, 또 일어날 수 없었던, 다른 어떤 사람들의 고통과 죽음 속에서도 일어나지 않았고, 또 일어날 수 없었던, 그 무언가가 보이지 않게 일어났습니다. 왜 그분께만 이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분께서, 그분만이 바로 그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와 같은, 하지만 우리 모두와 다른 한 사람, 그 속에서 하나님께서 계시고 역사하셨던 그 사람. 마치 그 로마의 백부장이 그분께서 돌아가시고 난 뒤 외친 것처럼 말입니다. “참으로 이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막 15:39)

하지만 이 사람 속에서, 그의 고통과 죽음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누구이셨고, 무엇을 하셨습니까? 사도 바울은 이것을 단 하나의 짧은 문장으로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 계셨고 세상을 자기와 화해하게 하셨습니다.” (고후 5:19) 이것을 여러분께 가능한 한 짧게 설명해 보겠습니다.

화해

이 사람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그분께서 만드신, 모든 것을 참으시고 사랑하신 세상에 스스로 오셨으며, 그 속으로 들어가셨으며, 스스로 세상과 같이, 다른 이들과 같은, 우리 모두와 같은 한 사람이 되셨습니다. 이것은 세상의 그분에 대한 싸움과 스스로를 파괴하는 그들 사이의 싸움을 끝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거대한 무질서에 그분의 질서를 세우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 사람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외는 주기도문의 내용처럼, 그분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셨고 그분의 다스리심이 오도록, 그분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셨습니다. (마 6:9~) 이 사람 속에서 그분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그분의 영광을 크게 하셨습니다. 세상의 피 흘리는 수많은 상처를 붕대로 감으셨을 뿐만 아니라, 치유하셨습니다. 우리 인간을, 그 유일한, 그분의 사랑하시는 아들의 인격 속에서, 부분적이고 임시적으로만이 아니라, 근본적이고 궁극적으로 도우셨고, 우리를 파괴에서 구하시며, 우리 모두를 그분의 자녀로 그분의 가슴으로 맞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모두 살 수 있도록, 참으로 그리고 영원히 살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 사람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인간적인 비뚤어짐, 우리의 자만심, 우리의 두려움, 우리의 탐욕, 우리의 잘못됨, 우리가 모두 계속해서 그분께 저지르는 모든 것, 우리가 서로에게 또 우리 자신에게 삶을 무겁게 하고 불가능하게 하는 모든 것을 마치 거대한 빗자루와 함께 쓸어버리셨고, 없애버리셨고, 치워버리셨습니다. 우리의 삶을 - 건강한 자와 병든 자의, 행복한 자와 불행한 자의, 높은 자와 낮은 자의, 가진 자와 가난한 자의, 자유로운 자와 붙잡힌 자의 삶을 - 그 뿌리에서부터 끔찍하고, 슬프고, 어둡게 만드는 모든 것을 그분께서 줄 그어 지워버리셨습니다. 더는 우리의 것이 아니도록, 우리의 뒤에 있도록, 그 한 사람의 속에서, 그분은 치워버리셨습니다. 그렇게 그분 속에서, 우리에게 긴 밤 뒤에 낮이, 우리에게 긴 겨울 뒤에 봄이 시작하도록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한 사람 속에서 이 일은 하나님께서 그 악의 모든 것을 스스로 떠맡으시고 우리의 비뚤어짐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시면서, 그분의 사랑하시는 아들 안에서 자신을 죄인으로 서도록, 고소하도록, 판결을 받도록, 죽음을 맞도록 하시면서 일어났습니다. 마치 그분, 그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이 저질렀고, 또 저지르는 모든 악한 것을 하신 것처럼 하셔서 말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희생하시면서, 그분은 세상과 화해하셨고, 그렇게 우리를 그분의 영원한 나라의 삶으로 구원하셨고,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우리 짐의 모든 무게를 짊어지시며, 그 짐을 우리에게서 가져가셨고 덜어내셨습니다. 죄 없으신 그분께서 죄 있는 우리의 자리에 서셨습니다. 강하신 그분께서 약한 우리의 편에 서셨습니다. 살아계신 그분께서 죽은 우리의 편에 서셨습니다!

사랑하는 친구 여러분, 이것이 그 보이지 않는 일이었고, 골고다 위의 세 십자가 중앙에 있던 남자의 삶과 죽음 속에서 하나님의 행하심으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이 화해 - 그의 유죄판결 속 우리의 무죄판결, 그의 패배 속 우리의 승리, 그의 고통 속 우리 기쁨의 시작, 그의 죽음 속 우리 삶의 탄생이었습니다. 그리고 - 잘 이해해야 합니다! - 이것은 그를 십자가에 달았던 그 사람들이 달성한 것입니다. 그들은 사실 그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몰랐습니다. (눅 23 : 34 참고) 그들이 바로 의인들[각주:9]이었기에, 사실 하나님께서 세상과 함께, 세상을 위해 - 이 모든 눈먼 자들을 위해서도 - 원하시고 이루신 선을 그들의 악한 의지와 행동[각주:10]으로 이루려고 했습니다.

그와 함께있던 죄인들

하지만 이제 다시 하나님의 의지와 행동과 같은 선하고 유익한 원칙으로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달린 죄인들에게로 돌아갑시다. 우리는 그들의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그들의 이전 삶이 어떠했는지, 그들이 무슨 일을 하려 했는지, 어떤 죄를 지었는지에 대해 아는 것이 없습니다. 그들이 저지른 일에 대해 어떤 변명이 있었는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무거운 죄를 지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단지 그들이 (어떤 경우에도!) 판결을 받았고, 그들 중 한 사람이 말한 것처럼 “저지른 일 때문에 그에 마땅한 벌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눅 23:41) 하지만 우리는 이 모든 것 외에도 그들이 그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또 그들의 의지와 다르게 정말로 예수와 십자가에 달렸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두 사람처럼 예수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화해와 하나님의 영광과 세상의 구원에 그렇게 직접, 그렇게 바로 옆에 있었던 사람은 전에도 후에도 없었습니다! 참으로 그랬습니다. 그가 그리스도라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왜 그는 자신을, 그리고 그들을 도우려 하지 않고 할 수 없는가! (눅 23:39) 그 둘 가운데 한 사람이, 복음서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모두의 맹목적이고 답답한 조롱에 가담하고 있을 때, 다른 한 사람만이 그가 누구였는지, 무엇이 그의 고통과 죽음 속에서 일어났는지, 이것이 모든 사람과 자신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았습니다. 이것은 분명 의미 있고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그 둘 사이의 차이점입니다. 우리는 하지만 지금 여기서 이에 대해 다루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 차이점이 그분께서 그 약속을 언급하셨을 정도로, 그리고 그 둘이 그렇게 분명하고 절박하게, 확실히 똑같이 받아들인 이 약속을 무너뜨릴 수 있었을 정도로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봅시다. 그와 함께 그의 오른편과 왼편에 달려 죽음을 맞이한 바로 이 죄인들을 위해 그 남자는 죽었습니다. 그는 선한 세상을 위해 죽지 않고, 오히려 악한 세상을 위해 죽었습니다. 경건한 이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신을 부인하는 이들을 위해서, 의로운 이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불의한 이들을 위해서였습니다. 그들이 무죄선고와 승리와 기쁨을 얻게 하기 위해서, 그들이 이로써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은 분명히 그리고 명백히 죄인이었습니다. 악한 이들이었고, 하나님을 부인하고 의롭지 못한 이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스스로 범법자로, 범죄자로 판결을 받으셨고 바로 그들과 함께 십자가에 달리셨으며 그들 또한 그분과 함께 같은 심판 아래에 있었습니다.

계속해서 생각해봅시다. 너희를 위해 내 몸을 희생한다! 너희를 위해 내 피를 쏟는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마지막 식사를 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은 이 일이 일어나기 전에 어떻게 이해되어야 했습니까? 하지만 이제는 이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제 그분의 몸은 희생되었고, 이제 그분의 피는 쏟아졌습니다. 이제 그 두 죄인은 이 희생과 피 쏟아짐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이들은 증인이 되었습니까! 그들은 그저 관중으로만 이 사건을 본 것이 아니라, 그분과의 공동체 안에서 그분과의 그 해체될 수 없는 연합 안에서 그들 자신의 악하고 슬프고 어두운 생명을 희생하면서, 그들 자신의 불결하고, 그 수많은 욕정으로 더럽혀진 피를 쏟으면서 증인이 되었습니다. 어떤 증인이 이와 같겠습니까! 너희를 위해 주어졌다! 너희를 위해 쏟아졌다! 이 말은 이들에게 얼마나 가까이에, 또 직접 일어났습니까! 이는 그들의 눈앞에 나타난 것뿐만이 아니라, 이야기로 들려진 것뿐만이 아니라, 말하자면 그들 스스로 현존 안에 심어졌고, 그들의 마음 곁뿐만 아니라, 그들의 죽어가는 마음 속에 심어졌습니다.

무엇보다 이 점을 생각해봅시다.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의 구원을 위한 그분의 이 거대한 업적과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승리가 분명 그들 옆에서, 그들 곁에서, 분명 그들의 현존 속에서 일어난 것 속에서 일어났습니다. 죽음을 이기신, 생명의 나라의 왕께서는 분명 불쌍하고, 두들겨 맞은 종이 되셨습니다. 그분의 죽음의 탄식 속에서 그들의 탄식이 섞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왕국의 시작을 향한 길에서, 그 선언에서, 세 번째 날 죽은 자 가운데 다시 살아나심을 향한 길에서 그분은 그들과 함께 돌아가신, 소멸을 맞으신 세 번째 남자였습니다! 그들이 그래서 그들 삶에서 가장 어두운 이 시간에 같은 목표를 향한 길 위에 있었다는 것이 명백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그분과 함께 우리도 또한 살아날 것임을 믿습니다.” (롬 6:8) 이렇게 다시 사도 바울은 한 번 더 씁니다. 정말 이 둘은 말 그대로 예수와 함께 죽었습니다. 그렇게 그들에게는 허락되었고, 그들은 그들 또한 말 그대로 그분과 함께 살아날 것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믿었습니까? 이 문제는 미결로 남겨둡시다. 하지만 그 모든 약속이 그들을 위해 있었다는 것은, 그들이 그 약속 아래에 있었다는 것은, 그들이 그래서 이 약속을 받았고 가졌다는 것은, 그들이 그와 함께 고통받고 죽을 수 있었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사람이 죄인으로서 예수와 함께 고통받고 죽을 수 있는 그곳에 존재하고, 그곳에 유효한 이 약속이 홀로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기초를 세우고 사람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듭니다. 그리고 그들, 그 두 사람은 예수와 함께 고통받고 죽을 수 있었기에, 처음으로 이 약속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로 모였던 이들이었습니다.

결론

우리는 이제 결론으로 왔습니다. 저는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이 나중에 그 두 죄인이 앞장섰던 그곳에 뒤따를 수만 있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 모든 시대의 사람들에게도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오직 이 약속이 미치고, 유효한 곳에만 있습니다. 이 약속은 하지만 십자가에 달린 죄인이며, 하나님 앞과 옆 사람 앞에서 전적으로 불의한, 그래서 희망없이 끝으로 가야 하는, 혼자 힘으로는 이를 막을 수 없는 사람에게만 미칩니다. 이 사람을 위해 예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잘 생각해보십시오. 이런 사람만이, 오직 이런 사람만이, 하지만 바로 이런 사람이 성찬식에 갈 수 있는 자격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사랑하는 친구 여러분,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되는지 질문을 받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형무소라고 부르는 이곳의 여러분은, 여러분을 이곳으로 이끈 그 무언가를 통해서, 여러분이 여기서 경험한 그 무언가를 통해서, 여러분만의 길을 통해서 - 저희 바깥의 다른 사람들은 저희의 다른, 하지만 - 그냥 믿어보십시오! - 더 우수하지는 않은 길을 통해서, 우리는 모두 그런 사람들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죄인과 같은 사람은 실제로 우리 모두입니다. 하지만 사실 단 한 가지에 도달하게 됩니다. 우리가 그런 사람들에게 주어진 약속을 들을 사람들이어서, 그리고 그 뒤에 따라 설 사람들이어서, 우리가 이런 죄인과 같은 사람들이라고 듣고자 하는가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벧전 5:5) 이것을 받고 이것을 얻을 사람은, 그 두 죄인이 처음으로 섰던 그곳을, 용감하게 뒤따르고자 하는, 너무 자만하지도 않지만, 너무 낙심하지도 않은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이것을 이룰 자유를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쓰시기 위해 도우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제 이 자유 안에서 함께 성찬에 참여하려 할 때, 우리 모두를 축복하실 것입니다! 아멘.


주 우리 하나님, 자비로우시며 전능하신 아버지, 주님께서 이 불쌍한 세상을 너무나도 사랑하시어 주님의 사랑하시는 아들이 세상의 자유와 우리 모두의 자유를 위해 그 놀라운 길을 걷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주님께는 이 길이 바른길이었고, 다른 것은 없었으며,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로 이 길이 바른길이고, 다른 것이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오직 그분을 통해서, 그리고 그분과의 교제를 통해서만 자유를 얻을 수 있다면, 오직 저 낮은 곳으로 내려가야만 높은 곳에 도달할 수 있다면, 오직 고통을 통해서만 기쁨을 얻을 수 있다면, 오직 죽음을 통해서만 생명에 이를 수 있다면, 그렇다면 이것을 주님의 선하고 합당하신 명령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이곳에서 그리고 세계 어디에서나 오늘 우리 주님의 돌아가심이 기억되는 곳에서, 그리고 이것이 전혀 기억되지 않거나, 바르게 기억되지 않는 곳에서도, 많은 이들이 예수님과 우리와 함께 주님을 길을 깨달을 수 있도록, 주님께서 질서를 세우신 길에서 평화를 찾도록 도우소서. 주님께서는 우리가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주님을 향해 활짝 열린 사람들에게 가실 수 있으십니다.

이 확신 속에서 우리는 이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병든 이들을, 가난하고 슬퍼하는 자들을 헤매거나 수많은 혼란에 빠진 이들을 생각합니다. 이 확신 속에서 주님께 간절히 구합니다. 우리 모두에게, 교회와 국가의 책임 있는 자리에서 권고하고 결정하고 판단하고 명령하는 일을 하는 이들에게, 노동자들과 그들의 고용주에게, 교사와 그들의 학생들에게, 책과 신문을 쓰는 이들에게, 그리고 그들의 독자에게 이 모든 사람에게 지혜의 영을 주소서. 그들 모두가, 우리가 모두 우리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여지기를, 그분의 십자가 앞에서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간절히 구합니다. 주님께서 모든 솔직한 기도를 들으신다는 것을 믿습니다. 주님께서는 참으로 거룩하시며 다정하십니다.

예수께서 사신다는 사실에, 그리고 우리가 그분과 함께 살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를 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지금 그 징표로 서로 성찬을 받을 수 있게 하심에 감사드립니다. 아멘.

성가

오 세상이여, 여기 그대의 생명을 보라
(O Welt, sieh hier dein Leben)
파울 게르하르트 작사, 하인리히 이자크 작곡

예수께서 사시며, 나도 그분과 함께
(Jesus lebt, mit ihm auch ich)
크리스티안 겔러트 작사, 요한 크뤼거 작곡


  1. 원문의 문법적 구조는 “… 포로가 되게 하셨고, … 죄있다 하셨으며, … 고통받게 하셨고, … 죽게 하셨습니다.”라는 내용이 “(주님께서 이루신) 주님의 선하시고 위대하신 뜻”임을 밝히고 있다. [본문으로]
  2. sich mit jdm gemein machen: “사회적, 도적적으로 낮은 사람과 우정의 관계로, 스스로를 같은 위치에 둔다”는 의미가 있다 (Duden). [본문으로]
  3. 혹은, 받아들여야(aufnehmen) [본문으로]
  4. sich in guter Gesellschaft befinden: “누군가가 당한 일이나, 누군가가 행동하고 말한 것이, 혼자 그런 것만이 아니라 다른, 유명한 사람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을 때 (그래서 상황의 부정적인 면이 약해지거나 긍정적인 면이 부각될 때)”에 쓰이기도 하는 관용구이기도 하다 (Duden). [본문으로]
  5. Bund: 원래는 ‘묶임’을 의미하며 약속, 연합이라는 의미로도 쓰인다. [본문으로]
  6. Gemeinde: (건물이 아닌 사람의 모임이라는 뜻에서) 교회라는 의미로도 쓰인다. [본문으로]
  7. Alles, was er ist, ist für sie: 영어로는 Everything that He is, He is for them. [본문으로]
  8. 소제목은 독자의 편의를 위해 역자가 임의로 붙임. [본문으로]
  9. die Rechten: 이 표현과 더불어 바르트는 이 설교의 많은 부분에서 '교회교의학 IV/2 - §67 성령과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건설'을 떠올리게 한다. 세상과 함께, 세상을 위해(mit der Welt und für die Welt)라는 표현은 바르트의 글 중에서 다음과 같이 §67 마지막에서만 쓰였다: "공동체(die Gemeinde)는 하나님의 법(das Recht Gottes)이 빛날 밤을 세상과 함께, 세상을 위해 기다리고 소망한다. (Sie wartet und hofft mit der Welt und für die Welt auf den Abend, an dem es licht sein wird.)" [본문으로]
  10. mit ihrem bösen Wollen und Tun: 의지와 행동은 각각 ‘원하다’와 ‘하다(혹은 이루다)’는 뜻을 가진 동사의 명사형태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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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심[각주:1]

요한의 첫째 서간 4장 18절 

1961년 8월 6일 바젤 형무소


오늘 우리가 들을 성서의 말씀은 요한의 첫째 서간 4장 18절이며 다음과 같습니다.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고, 도리어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께서는 모두 일생에 언젠가 한 번 ‘회심’이라는 단어를 들어본 적이 분명히 있으실 것입니다. 회심은 인간의 삶에서 어떤 다른, 더 나은 길로 돌아서는 것, 새롭게 나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회심 - 이에 대해서 시대를 불문하고 그리스도인들은 많이 곰곰이 생각하였고 많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에도 누군가에게 한 번 이렇게 회심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보신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분께 필요한 것은 여러분의 마음을 돌이키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들의 마음을 돌이키는 것입니다. 단지 한 번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매일같이 새롭게 마음을 돌이키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매일의 회개이어야 한다.” 회개라는 말 또한 역시 회심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바르게 이해했다면, 우리가 방금 들은 말씀은 회심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쓰인 모든 것, 우리가 사랑과 두려움에 관해 들은 모든 것이 결국 우리가 회심할 수 있으며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하지만 이러한 것은 이 말씀의 행간에 숨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설교가 끝날 때 다시 하기로 하고 지금은 우선 환하게 드러나 있는 것들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은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 안에!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사랑 안에! 사랑이 마치 사람이 거하고, 살고, 앉고, 서고, 들어갈 수 있는 어떤 장소, 공간, 집과 같은 것인 듯 말하고 있습니다. 성서에는 이와 비슷한 표현이 더 있습니다. 믿음 안에서, 성령 안에서, 주님 안에서 혹은 그리스도 안에서와 같은 표현들을 우리는 가끔 읽을 수 있습니다. 성서는 이렇게 언제나 같은 집을 서술하고 있고, 지금은 이 집을 사랑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사랑 안에서!” 오늘 우리는 이 사랑이라는 관점에서 이 집을 볼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이 집에는 하나의 규칙이 있다는 것을 듣습니다. 이 규칙의 첫 번째 문장, 그러니까 제1조는 다음과 같습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다.” 다르게 말한다면 두려움은 이 집에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여기에 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전철 안의 “흡연 금지” 혹은 어떤 건설현장에서 볼 수 있는 “관계자 외 출입금지”와 같은 표지가 생각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서 듣는 것은 단순한 금지가 아닙니다. 오늘 본문은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다고 합니다,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고 있습니다. 마치 우리가 가끔 환기를 할 때 나쁜 공기가 밖으로 나가듯,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혹은, 더 좋은 예로 극장이나 공연장에서 막이 오르면 사람들의 잡담 소리가 멈추듯이 말입니다.


인간적인 사랑


하지만 이제 여기서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이해하려고 한다면, 한 번 눈을 돌려 숙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이라고 할 때, 그러니까 우리가 사랑이라고 아는 것, 인간적인 사랑에 대해 이야기 할 때,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이것에 대해서는 말할 것이 많을 것 같습니다. 이제 이 사랑, 인간적인 사랑이 기껏해야 -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기껏해야 - 무엇을 의미할 수 있을지 설명해 보겠습니다. 사랑은 사람 사이의 관계일 것입니다. 어쩌면 두 사람 사이, 어쩌면 세 사람 사이, 어쩌면 많은 사람 사이, 어쩌면 한 무리의 사람들 사이의 관계일 것입니다. 이 관계 속에서 이 사람들은 다시 서로 떨어지거나 서먹서먹하지 않고, 다시 무관심하거나 불편해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사람들은 서로 알게 되고 이해하게 되고 서로 믿으며 의지합니다. 그래서 보통 서로 떨어져 있기 싫어하고 무의식적으로 갈망하고 끌어당기며 함께 있으려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서로에게 자신을 헌신하며 서로 마주 보고 서거나 함께 살아갑니다.


아름답지 않습니까? 분명 아름답지만, 사실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지나치게 아름답습니다. 실제의 삶에서 우리는 모두 그저 이 사랑에서 부분적으로만, 조금만을 가끔, 원래 사랑이어야 할 것과는 다른 비슷한 모습을 만날 뿐입니다. 마치 빛바랜 사진이 누군가의 모습을 우리가 이렇게 말할 수 있을 만큼만 보여주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 이제 조금 누군지 알겠어. 아마 너 아니면 나겠지. 그런데 우리의 실제 모습과는 너무 다른 것 같아.”


그런데 지금 이렇게 말하시려는 분께서 아마 우리 가운데에 계실 수도 있겠습니다. “지금 설명하고 계신 그런 사랑은 제 삶에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랑 비슷한 것은커녕, 저를 사랑하는 사람도 없고, 제가 사랑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외롭고, 정말 외롭습니다. 서로 멀고 낯설게만 지내며 서로가 마주 보지 않는 이 세상 속의 저는 너무나도 외롭습니다.”


한 가지는 확실합니다. 이 사랑은, 그러니까 우리가 이 단어를 말할 때 의미하는 사랑, 그리고 아마도 우리가 알고 있거나, 모른다고 주장하는 이 인간적인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사랑의 집이 얼마나 아름답든, 그 안에는 수많은 두려움이 있습니다. 서로 경험할 수 있을 실망에 대한 두려움, 서로를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 마치 거대한 그림자처럼 뒤에서부터 우리의 삶으로 빠져 들어오는 과거에 대한 두려움, 앞에서부터 우리에게 닥쳐오는 또 다른 그림자인 미래에 대한 두려움,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과 스스로에 대한 두려움, 운명에 대한 두려움,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악마에 대한 두려움까지. 이 인간적인 사랑의 집에는 어떠한 경우에도 두려움의 유령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 집은 그래서 여전히 정말 아름다운 집이거나, 마치 그래도 사람이 잘 살 수 있는 주말농장의 오두막일 수는 있겠지만,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다”는 제1조의 집은 아닙니다.


완전한 사랑


이제 정말 다른 집에 대해서, 정말 다른 사랑에 대해서, 우리 본문이 말하는 “완전한 사랑”에 대해서 조금 말씀드리려 합니다. 이 사랑은 그저 조각난 사랑이 아닌 가득 찬 사랑이며, 입김처럼 그냥 지나가 버리지 않고, 머물러 있는 사랑이며, 그 속에 두려움이 없는 사랑입니다. 이제 여러분 가운데 슬퍼하시는 분들도, 혹시라도 “저는 사랑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겠습니다”고 하시는 분들도 잘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랑이 있습니다. 이 사랑 또한 어떤 관계입니다. 관계라는 말은 너무 약한 단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사랑은 굳건하며, 조직적이고, 파기될 수 없는 언약입니다. 우리가 언약 안에 있으면 우리는 이 언약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누가 이 언약 안에 있습니까? 하느님께서 그 속에 계십니다. 그분은 주님이시며, 자유로우시며, 높으시며, 누구에게 무엇도 빚지지 않는 분이시며, 누구도, 무엇도 그분 없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분께서 이 언약을 맺으시며 지키십니다. 그리고 다른 한 편에는 - 언약은 두 사람이 맺는 것이니 - 다른 한 편에는 우리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입니다. 이 하느님의 언약은 하느님과 여러분, 저, 우리 모두 사이에 맺어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우리와의 언약을 원하시며 가지시고, 맺으시며, 세우시는 것입니까? 혹시 우리가 강하며, 아름다우며, 선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그렇지 못합니다. 아니면 하느님께서 우리를 필요로 하셔서 어떤 목적에 쓰시기 위해서입니까? 아닙니다. 그분께는 우리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아니면 하느님과 언약 속에 있는 것을 우리가 이해하기 어렵게도 선하게 여겨서, 우리의 공로로 얻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 언약은 우리의 공로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 언약을 선하게 여기지도, 그렇게 만들지도 못합니다. 하느님께서 이 언약을 맺으시고, 그분과 우리 사이에 이 언약을 지키시는 이유는 오직 한 가지입니다. 이것이 그분의 자유로우시며, 선하시며, 전능하시며, 자비로우시며, 거룩한 뜻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런 대가 없이 하시는 것입니다. “그 사랑은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1요한 4, 10) 또한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외아드님을 주셨습니다.” (요한 3, 16) 하느님의 아드님은 하느님과 다르지 않은 하느님 스스로이시지만, 자신만을 위해 높은 곳과 영원 속에서 신으로 있기 원하신 분이 아니며, 또한 우리를 홀로 있도록 내버려 두기 원하신 분도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오신 분이십니다. 우리와 같으시며, 우리의 이웃이시며, 스스로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셨으며, 베들레헴 구유 속의 아기로 오시어 골고타 십자가에 매달리신 분이십니다. 이것이 그 완전한 사랑입니다. 이렇게 우리를 하느님께서 아시며, 열망하시며, 찾으시며, 찾아내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의 하느님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그분의 계약이며, 이것이 완전한 사랑, 하느님의 사랑의 집입니다. 이 안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이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바로 이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셨고, 사랑하시며, 바로 이 때문에 당신의 외아드님 안에서 자신을 내 주시었습니다. 바로 우리가 더이상 두려워하지 않도록, 두려워할 이유가 없도록 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으므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두려움에 대한 모든 이유는 없애졌으며 떼어내졌고, 지워졌으며 파괴되어 사라졌습니다.

혹시 어떤 사람이 한 번쯤 나쁜 말을 하면, “그 사람은 나를 좋게 생각하지 않아”하고 생각하면서, 또 그 사람이 여러분께 나쁜 일을 저지를 것이라고 예상하며, 이런 사람을 두려워하십니까? 왜 이런 사람을 두려워해야 합니까? 이 사람이 하느님께 대항해서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가 하느님께 대항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 여러분께 대항해서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께서 여러분의 편이신데 말입니다. 여러분은 정말 아무것도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사람이 여러분께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시편 56, 5-12 참조)

- 아니면 여러분께서 좋아하시고,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 어쩌다가 곁에서 사라질 것을 두려워하십니까? 하지만 그 사람도 하느님의 곁에서는 사라질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가 하느님의 곁에서 사라질 수 없다면 실제로는 여러분의 곁에서도 사라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또한 두려워할 이유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 아니면 제가 방금 간략히 말씀드린 것처럼, 과거와 미래와 죽음을 두려워하십니까? 네, 하지만 보십시오. 여러분은 여러분의 과거와 여러분의 미래와 여러분의 죽음까지, 그리고 여러분의 죽음을 넘어서도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왜 이 환영을 두려워하려 하십니까? 하느님의 완전한 사랑은 여러분의 모든 삶 처음부터 끝을 넘어 저 너머까지 이릅니다.

- 아니면 여러분께서는 - 이건 제게 항상 일어나는 일입니다만, 이것이 두려움에 대한 가장 강력한 이유가 될 수 있습니다 -, 여러분 자신을, 본인의 약함을, 그리고 어쩌면 약함 뿐만 아니라 악함도 두려워하십니까? 견디기 어려운 유혹, 가끔은 너무나 견디기 어려운 유혹을 두려워하십니까? 여러분의 머릿속에 있을지 모를 무너짐과 한 사람의 뇌리를 스칠지 모를 악행을 두려워하십니까? 멈추십시오! 이것도 이유가 되지 못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의 마음보다 크신 분이시며(1요한 3, 20 참조), 하느님께서는 여러분께서 두려워하실지 모를, 두려워하실 수밖에 없었을 여러분 속의 그 모든 것보다 강하신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 더 강하신데, 여러분 속의 그 모든 악한 세계에 대해 한 번 맞서기 시작해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느님께서 먼저 이 악한 세계에 대항하십니다. 하느님의 뒤를 따르십시오! 함께 하십시오! 여러분은 하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두려워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 아니면 악마가 두렵습니까? 몇몇 분들이 악마에 대해 웃으셨지만, 실제로는 많고 많은 사람이 근본적으로 악마를 두려워합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짧게만 말하겠습니다. 악마의 일을 멸하기 위해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오셨습니다(1요한 3, 8). 그분께서는 이 일을 멸하셨고, 이제 우리가 이 일이 멸하여지기를 원합니다.


두려워야 할 또 다른 이유가 있겠습니까? 물론, 아직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이유도 이 완전한 사랑의 집에서 존재할 공간을 가지지는 못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무언가 혹은 누군가에 대해 가지는 어떤 두려움도 이 사랑, 이 완전한 사랑으로 쫓겨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으로 끝입니다. 그렇습니다.


회심


네, 하지만 이제 어쩌면 여러분 중 한두 분은 이렇게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참 좋고 옳은 말씀입니다. 지금이 일요일 아침이고, 우리가 지금 예배당에 있으니, 제가 듣고는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집 말입니다, 그 완전한 사랑, 그곳에 저는 들어가 있습니까? 방금 그렇게 끝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저는 그래도 아직 두렵습니다. 모든 것이 밤에도 낮에도 두렵습니다. 그리고 그래서, 제가 이렇게 두려우니, 제가 이 집 안에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저는 그 두려움이 없는 완전한 사랑 안에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다만 어딘가 밖에서, 길거리에, 너무나 위험한 거리 한복판에, 무언가 쏜쌀같이 달려와 나를 치고 지나가지 않을까, 두렵게도 왼쪽을 살펴야 하고 오른쪽을 살펴야 하는 이곳에 있는 것 같습니다.” 회심하지 않은 사람은 이렇게 생각하고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고 이제, 이 사람이 계속 이렇게 생각하고 말한다면, 모든 것이 더 나빠질 것입니다. “아, 그 안에 있는 것은 참 좋겠습니다. 저도 사랑 안에 있고 싶고, 두려움을 갖지 않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이제 어떻게 그 안으로 갈 수 있습니까? 벽을 기어올라 넘고, 어쩌면 창문을 몇 개 부숴야 합니까? 어떤 기술을 가지고, 어떻게 발버둥을 치고, 어떻게 노력해야 그 안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그래서 그 뒤로 제가 더는 두려워하지 않게 말입니다.”


이제 다시 한 번 말씀 드립니다. 정말 진지하게 말씀 드립니다. 회심하지 않은 사람은 이렇게 생각하고 이렇게 말합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이 완전한 사랑의 집에 우리가 우리 자신의 힘으로 들어가는 것이, 또 몰래 들어가는 것이, 기어 올라가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완전한 사랑이 우리에게 온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를 위해 계신 구원자입니다. - “그분께서 나를 안으셨네, 내가 그분을 생각하기도 전에”[각주:2] - , 중요한 것은 하늘의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지으신 이 집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이 집을 우리의 가엾고 어두운 땅 위에 내려주셨습니다. 이 집은 여기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이 집은 우리가 이 집 안이 아닌 어디에도 있지 않도록 서 있습니다.


네, 우리가 지금 아직도 두려워한다면, 도대체 무엇이 문제입니까? 문제는 그렇다면 바로, 분명 틀림없이 우리가 정말 어디에 있는지 아직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회심하지 않은 사람의 행위이고 행동이며 생각이고 이야기입니다.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고 있기 때문에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잠이 들어 꿈을 꾸고 있습니다. 꿈이 늘 사실이 아니듯, 꿈을 꾸고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아직도 두려워해야만 하며, 두려워할 수 있다고 꿈을 꾸고 있습니다. 아직도 두려움에 대한 실질적인 이유가 있다고 꿈을 꾸고 있습니다. 이것이 회심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회심이란 무엇입니까? 돌아선다는 것은 무엇이며 회개란 무엇입니까? 우리가 밟아도 되는, 밟아야 할 이 새로운 길은 어떤 길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회심이란 정말 간단한 것입니다. 우리가 깨어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두려워할 이유가 있다는 이 꿈과 잘못을, 우리가 눈을 열어 우리 뒤에 놓는 것입니다. 아주 작은 어린이들처럼, 우리가 태어났을 때 처음으로 한 것처럼, 눈을 열고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본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밖이 아니라 어떤 재능과 버둥댐 없이 완전한 사랑 안에 있습니다. 먼저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이 안에, 두려움에 대한 아무런 이유가 없기에, 이 사랑이 두려움을 쫓아내기에, 아무런 두려움이 없는 이 속에 우리가 있습니다.


성령께서 한 사람의 마음에 이야기하실 때, 그때 이 사람은 회심합니다. 그때 눈을 뜹니다. 마치 작은 아이가 태어나 눈을 뜨듯 말입니다. 그래서 회심을 인간의 중생(다시 태어남)이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그 때 그는 그가 어디에 있는지 깨달으며, 그때 그는 더는 두려워할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그의 마음속에, 그가 피할 수 없는 그곳에, 그가 들어야만 하는 그곳에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잠자는 사람아, 깨어나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를 비추어 주시리라.” (에페 5, 14) 그리고 계속해서. “내가 너를 풀어주니,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으니, 너는 나의 것이다.”


형제자매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이것을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주시며 제게도 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오늘, 지금, 내일도 다시 영원히 새롭게 주실 것입니다. 아멘.



  1. 바르트의 설교집 "나를 부르라(Rufe mich an!)"에는 이 설교가 빠져있다. [본문으로]
  2. Paul Gerhardt의 «Sollt ich meinem Gott nicht singen»에서: 주님, 나를 지키시는 분, 내가 처음 존재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그분께서 나를 안으셨네, 내가 그분을 생각하기도 전에.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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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바르트 > 나를 부르라 (1959~1964)'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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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Fleur de Sel 트랙백 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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