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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2.05 칼 바르트: 회심


회심[각주:1]

요한의 첫째 서간 4장 18절 

1961년 8월 6일 바젤 형무소


오늘 우리가 들을 성서의 말씀은 요한의 첫째 서간 4장 18절이며 다음과 같습니다.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고, 도리어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께서는 모두 일생에 언젠가 한 번 ‘회심’이라는 단어를 들어본 적이 분명히 있으실 것입니다. 회심은 인간의 삶에서 어떤 다른, 더 나은 길로 돌아서는 것, 새롭게 나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회심 - 이에 대해서 시대를 불문하고 그리스도인들은 많이 곰곰이 생각하였고 많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에도 누군가에게 한 번 이렇게 회심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보신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분께 필요한 것은 여러분의 마음을 돌이키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들의 마음을 돌이키는 것입니다. 단지 한 번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매일같이 새롭게 마음을 돌이키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매일의 회개이어야 한다.” 회개라는 말 또한 역시 회심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바르게 이해했다면, 우리가 방금 들은 말씀은 회심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쓰인 모든 것, 우리가 사랑과 두려움에 관해 들은 모든 것이 결국 우리가 회심할 수 있으며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하지만 이러한 것은 이 말씀의 행간에 숨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설교가 끝날 때 다시 하기로 하고 지금은 우선 환하게 드러나 있는 것들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은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 안에!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사랑 안에! 사랑이 마치 사람이 거하고, 살고, 앉고, 서고, 들어갈 수 있는 어떤 장소, 공간, 집과 같은 것인 듯 말하고 있습니다. 성서에는 이와 비슷한 표현이 더 있습니다. 믿음 안에서, 성령 안에서, 주님 안에서 혹은 그리스도 안에서와 같은 표현들을 우리는 가끔 읽을 수 있습니다. 성서는 이렇게 언제나 같은 집을 서술하고 있고, 지금은 이 집을 사랑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사랑 안에서!” 오늘 우리는 이 사랑이라는 관점에서 이 집을 볼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이 집에는 하나의 규칙이 있다는 것을 듣습니다. 이 규칙의 첫 번째 문장, 그러니까 제1조는 다음과 같습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다.” 다르게 말한다면 두려움은 이 집에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여기에 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전철 안의 “흡연 금지” 혹은 어떤 건설현장에서 볼 수 있는 “관계자 외 출입금지”와 같은 표지가 생각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서 듣는 것은 단순한 금지가 아닙니다. 오늘 본문은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다고 합니다,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고 있습니다. 마치 우리가 가끔 환기를 할 때 나쁜 공기가 밖으로 나가듯,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혹은, 더 좋은 예로 극장이나 공연장에서 막이 오르면 사람들의 잡담 소리가 멈추듯이 말입니다.


인간적인 사랑


하지만 이제 여기서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이해하려고 한다면, 한 번 눈을 돌려 숙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이라고 할 때, 그러니까 우리가 사랑이라고 아는 것, 인간적인 사랑에 대해 이야기 할 때,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이것에 대해서는 말할 것이 많을 것 같습니다. 이제 이 사랑, 인간적인 사랑이 기껏해야 -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기껏해야 - 무엇을 의미할 수 있을지 설명해 보겠습니다. 사랑은 사람 사이의 관계일 것입니다. 어쩌면 두 사람 사이, 어쩌면 세 사람 사이, 어쩌면 많은 사람 사이, 어쩌면 한 무리의 사람들 사이의 관계일 것입니다. 이 관계 속에서 이 사람들은 다시 서로 떨어지거나 서먹서먹하지 않고, 다시 무관심하거나 불편해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사람들은 서로 알게 되고 이해하게 되고 서로 믿으며 의지합니다. 그래서 보통 서로 떨어져 있기 싫어하고 무의식적으로 갈망하고 끌어당기며 함께 있으려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서로에게 자신을 헌신하며 서로 마주 보고 서거나 함께 살아갑니다.


아름답지 않습니까? 분명 아름답지만, 사실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지나치게 아름답습니다. 실제의 삶에서 우리는 모두 그저 이 사랑에서 부분적으로만, 조금만을 가끔, 원래 사랑이어야 할 것과는 다른 비슷한 모습을 만날 뿐입니다. 마치 빛바랜 사진이 누군가의 모습을 우리가 이렇게 말할 수 있을 만큼만 보여주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 이제 조금 누군지 알겠어. 아마 너 아니면 나겠지. 그런데 우리의 실제 모습과는 너무 다른 것 같아.”


그런데 지금 이렇게 말하시려는 분께서 아마 우리 가운데에 계실 수도 있겠습니다. “지금 설명하고 계신 그런 사랑은 제 삶에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랑 비슷한 것은커녕, 저를 사랑하는 사람도 없고, 제가 사랑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외롭고, 정말 외롭습니다. 서로 멀고 낯설게만 지내며 서로가 마주 보지 않는 이 세상 속의 저는 너무나도 외롭습니다.”


한 가지는 확실합니다. 이 사랑은, 그러니까 우리가 이 단어를 말할 때 의미하는 사랑, 그리고 아마도 우리가 알고 있거나, 모른다고 주장하는 이 인간적인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사랑의 집이 얼마나 아름답든, 그 안에는 수많은 두려움이 있습니다. 서로 경험할 수 있을 실망에 대한 두려움, 서로를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 마치 거대한 그림자처럼 뒤에서부터 우리의 삶으로 빠져 들어오는 과거에 대한 두려움, 앞에서부터 우리에게 닥쳐오는 또 다른 그림자인 미래에 대한 두려움,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과 스스로에 대한 두려움, 운명에 대한 두려움,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악마에 대한 두려움까지. 이 인간적인 사랑의 집에는 어떠한 경우에도 두려움의 유령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 집은 그래서 여전히 정말 아름다운 집이거나, 마치 그래도 사람이 잘 살 수 있는 주말농장의 오두막일 수는 있겠지만,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다”는 제1조의 집은 아닙니다.


완전한 사랑


이제 정말 다른 집에 대해서, 정말 다른 사랑에 대해서, 우리 본문이 말하는 “완전한 사랑”에 대해서 조금 말씀드리려 합니다. 이 사랑은 그저 조각난 사랑이 아닌 가득 찬 사랑이며, 입김처럼 그냥 지나가 버리지 않고, 머물러 있는 사랑이며, 그 속에 두려움이 없는 사랑입니다. 이제 여러분 가운데 슬퍼하시는 분들도, 혹시라도 “저는 사랑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겠습니다”고 하시는 분들도 잘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랑이 있습니다. 이 사랑 또한 어떤 관계입니다. 관계라는 말은 너무 약한 단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사랑은 굳건하며, 조직적이고, 파기될 수 없는 언약입니다. 우리가 언약 안에 있으면 우리는 이 언약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누가 이 언약 안에 있습니까? 하느님께서 그 속에 계십니다. 그분은 주님이시며, 자유로우시며, 높으시며, 누구에게 무엇도 빚지지 않는 분이시며, 누구도, 무엇도 그분 없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분께서 이 언약을 맺으시며 지키십니다. 그리고 다른 한 편에는 - 언약은 두 사람이 맺는 것이니 - 다른 한 편에는 우리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입니다. 이 하느님의 언약은 하느님과 여러분, 저, 우리 모두 사이에 맺어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우리와의 언약을 원하시며 가지시고, 맺으시며, 세우시는 것입니까? 혹시 우리가 강하며, 아름다우며, 선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그렇지 못합니다. 아니면 하느님께서 우리를 필요로 하셔서 어떤 목적에 쓰시기 위해서입니까? 아닙니다. 그분께는 우리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아니면 하느님과 언약 속에 있는 것을 우리가 이해하기 어렵게도 선하게 여겨서, 우리의 공로로 얻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 언약은 우리의 공로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 언약을 선하게 여기지도, 그렇게 만들지도 못합니다. 하느님께서 이 언약을 맺으시고, 그분과 우리 사이에 이 언약을 지키시는 이유는 오직 한 가지입니다. 이것이 그분의 자유로우시며, 선하시며, 전능하시며, 자비로우시며, 거룩한 뜻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런 대가 없이 하시는 것입니다. “그 사랑은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1요한 4, 10) 또한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외아드님을 주셨습니다.” (요한 3, 16) 하느님의 아드님은 하느님과 다르지 않은 하느님 스스로이시지만, 자신만을 위해 높은 곳과 영원 속에서 신으로 있기 원하신 분이 아니며, 또한 우리를 홀로 있도록 내버려 두기 원하신 분도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오신 분이십니다. 우리와 같으시며, 우리의 이웃이시며, 스스로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셨으며, 베들레헴 구유 속의 아기로 오시어 골고타 십자가에 매달리신 분이십니다. 이것이 그 완전한 사랑입니다. 이렇게 우리를 하느님께서 아시며, 열망하시며, 찾으시며, 찾아내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의 하느님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그분의 계약이며, 이것이 완전한 사랑, 하느님의 사랑의 집입니다. 이 안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이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바로 이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셨고, 사랑하시며, 바로 이 때문에 당신의 외아드님 안에서 자신을 내 주시었습니다. 바로 우리가 더이상 두려워하지 않도록, 두려워할 이유가 없도록 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으므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두려움에 대한 모든 이유는 없애졌으며 떼어내졌고, 지워졌으며 파괴되어 사라졌습니다.

혹시 어떤 사람이 한 번쯤 나쁜 말을 하면, “그 사람은 나를 좋게 생각하지 않아”하고 생각하면서, 또 그 사람이 여러분께 나쁜 일을 저지를 것이라고 예상하며, 이런 사람을 두려워하십니까? 왜 이런 사람을 두려워해야 합니까? 이 사람이 하느님께 대항해서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가 하느님께 대항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 여러분께 대항해서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께서 여러분의 편이신데 말입니다. 여러분은 정말 아무것도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사람이 여러분께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시편 56, 5-12 참조)

- 아니면 여러분께서 좋아하시고,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 어쩌다가 곁에서 사라질 것을 두려워하십니까? 하지만 그 사람도 하느님의 곁에서는 사라질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가 하느님의 곁에서 사라질 수 없다면 실제로는 여러분의 곁에서도 사라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또한 두려워할 이유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 아니면 제가 방금 간략히 말씀드린 것처럼, 과거와 미래와 죽음을 두려워하십니까? 네, 하지만 보십시오. 여러분은 여러분의 과거와 여러분의 미래와 여러분의 죽음까지, 그리고 여러분의 죽음을 넘어서도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왜 이 환영을 두려워하려 하십니까? 하느님의 완전한 사랑은 여러분의 모든 삶 처음부터 끝을 넘어 저 너머까지 이릅니다.

- 아니면 여러분께서는 - 이건 제게 항상 일어나는 일입니다만, 이것이 두려움에 대한 가장 강력한 이유가 될 수 있습니다 -, 여러분 자신을, 본인의 약함을, 그리고 어쩌면 약함 뿐만 아니라 악함도 두려워하십니까? 견디기 어려운 유혹, 가끔은 너무나 견디기 어려운 유혹을 두려워하십니까? 여러분의 머릿속에 있을지 모를 무너짐과 한 사람의 뇌리를 스칠지 모를 악행을 두려워하십니까? 멈추십시오! 이것도 이유가 되지 못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의 마음보다 크신 분이시며(1요한 3, 20 참조), 하느님께서는 여러분께서 두려워하실지 모를, 두려워하실 수밖에 없었을 여러분 속의 그 모든 것보다 강하신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 더 강하신데, 여러분 속의 그 모든 악한 세계에 대해 한 번 맞서기 시작해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느님께서 먼저 이 악한 세계에 대항하십니다. 하느님의 뒤를 따르십시오! 함께 하십시오! 여러분은 하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두려워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 아니면 악마가 두렵습니까? 몇몇 분들이 악마에 대해 웃으셨지만, 실제로는 많고 많은 사람이 근본적으로 악마를 두려워합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짧게만 말하겠습니다. 악마의 일을 멸하기 위해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오셨습니다(1요한 3, 8). 그분께서는 이 일을 멸하셨고, 이제 우리가 이 일이 멸하여지기를 원합니다.


두려워야 할 또 다른 이유가 있겠습니까? 물론, 아직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이유도 이 완전한 사랑의 집에서 존재할 공간을 가지지는 못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무언가 혹은 누군가에 대해 가지는 어떤 두려움도 이 사랑, 이 완전한 사랑으로 쫓겨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으로 끝입니다. 그렇습니다.


회심


네, 하지만 이제 어쩌면 여러분 중 한두 분은 이렇게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참 좋고 옳은 말씀입니다. 지금이 일요일 아침이고, 우리가 지금 예배당에 있으니, 제가 듣고는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집 말입니다, 그 완전한 사랑, 그곳에 저는 들어가 있습니까? 방금 그렇게 끝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저는 그래도 아직 두렵습니다. 모든 것이 밤에도 낮에도 두렵습니다. 그리고 그래서, 제가 이렇게 두려우니, 제가 이 집 안에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저는 그 두려움이 없는 완전한 사랑 안에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다만 어딘가 밖에서, 길거리에, 너무나 위험한 거리 한복판에, 무언가 쏜쌀같이 달려와 나를 치고 지나가지 않을까, 두렵게도 왼쪽을 살펴야 하고 오른쪽을 살펴야 하는 이곳에 있는 것 같습니다.” 회심하지 않은 사람은 이렇게 생각하고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고 이제, 이 사람이 계속 이렇게 생각하고 말한다면, 모든 것이 더 나빠질 것입니다. “아, 그 안에 있는 것은 참 좋겠습니다. 저도 사랑 안에 있고 싶고, 두려움을 갖지 않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이제 어떻게 그 안으로 갈 수 있습니까? 벽을 기어올라 넘고, 어쩌면 창문을 몇 개 부숴야 합니까? 어떤 기술을 가지고, 어떻게 발버둥을 치고, 어떻게 노력해야 그 안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그래서 그 뒤로 제가 더는 두려워하지 않게 말입니다.”


이제 다시 한 번 말씀 드립니다. 정말 진지하게 말씀 드립니다. 회심하지 않은 사람은 이렇게 생각하고 이렇게 말합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이 완전한 사랑의 집에 우리가 우리 자신의 힘으로 들어가는 것이, 또 몰래 들어가는 것이, 기어 올라가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완전한 사랑이 우리에게 온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를 위해 계신 구원자입니다. - “그분께서 나를 안으셨네, 내가 그분을 생각하기도 전에”[각주:2] - , 중요한 것은 하늘의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지으신 이 집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이 집을 우리의 가엾고 어두운 땅 위에 내려주셨습니다. 이 집은 여기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이 집은 우리가 이 집 안이 아닌 어디에도 있지 않도록 서 있습니다.


네, 우리가 지금 아직도 두려워한다면, 도대체 무엇이 문제입니까? 문제는 그렇다면 바로, 분명 틀림없이 우리가 정말 어디에 있는지 아직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회심하지 않은 사람의 행위이고 행동이며 생각이고 이야기입니다.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고 있기 때문에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잠이 들어 꿈을 꾸고 있습니다. 꿈이 늘 사실이 아니듯, 꿈을 꾸고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아직도 두려워해야만 하며, 두려워할 수 있다고 꿈을 꾸고 있습니다. 아직도 두려움에 대한 실질적인 이유가 있다고 꿈을 꾸고 있습니다. 이것이 회심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회심이란 무엇입니까? 돌아선다는 것은 무엇이며 회개란 무엇입니까? 우리가 밟아도 되는, 밟아야 할 이 새로운 길은 어떤 길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회심이란 정말 간단한 것입니다. 우리가 깨어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두려워할 이유가 있다는 이 꿈과 잘못을, 우리가 눈을 열어 우리 뒤에 놓는 것입니다. 아주 작은 어린이들처럼, 우리가 태어났을 때 처음으로 한 것처럼, 눈을 열고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본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밖이 아니라 어떤 재능과 버둥댐 없이 완전한 사랑 안에 있습니다. 먼저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이 안에, 두려움에 대한 아무런 이유가 없기에, 이 사랑이 두려움을 쫓아내기에, 아무런 두려움이 없는 이 속에 우리가 있습니다.


성령께서 한 사람의 마음에 이야기하실 때, 그때 이 사람은 회심합니다. 그때 눈을 뜹니다. 마치 작은 아이가 태어나 눈을 뜨듯 말입니다. 그래서 회심을 인간의 중생(다시 태어남)이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그 때 그는 그가 어디에 있는지 깨달으며, 그때 그는 더는 두려워할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그의 마음속에, 그가 피할 수 없는 그곳에, 그가 들어야만 하는 그곳에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잠자는 사람아, 깨어나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를 비추어 주시리라.” (에페 5, 14) 그리고 계속해서. “내가 너를 풀어주니,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으니, 너는 나의 것이다.”


형제자매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이것을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주시며 제게도 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오늘, 지금, 내일도 다시 영원히 새롭게 주실 것입니다. 아멘.



  1. 바르트의 설교집 "나를 부르라(Rufe mich an!)"에는 이 설교가 빠져있다. [본문으로]
  2. Paul Gerhardt의 «Sollt ich meinem Gott nicht singen»에서: 주님, 나를 지키시는 분, 내가 처음 존재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그분께서 나를 안으셨네, 내가 그분을 생각하기도 전에.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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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Fleur de Sel 트랙백 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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