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름'에 해당되는 글 5건

  1. 2015.04.12 개신교신학 입문?
  2. 2015.03.31 시작에 관해서
  3. 2015.01.04 파편들
  4. 2013.01.23 나 가는 곳
  5. 2012.01.18 세 사람

개신교신학 입문?

2015.04.12 13:07 from 흐름

바르트의 마지막 강의인 "Einführung in die evangelische Theologie"가 지난해 한국어로 다시 번역되어 출간되었다. 마지막 장인 "사랑(Die Liebe)"은 녹음되어서 LP판으로 나오기도 했고 칼 바르트 아카이브 웹사이트에서 20초 가량 짧게나마 들어 볼 수도 있다. 

한국어 역본은 이전에 이형기 선생님의 것이 있었는데 직접 접해본 적은 없고, 이번에 새로 나온 책도 인터넷에서 몇 장 미리보기로 봐서 번역이 어떤지는 모르겠다. 물론 신준호 선생님이야 그동안 바르트 번역으로 내공이 깊으신 분이니... 그런데 책 제목에 관해서라면, 만약 바르트가 한국어를 했다면 개신교신학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할 지는 좀 궁금해진다. 

독일에서 그냥 기독교인이라고 하거나 신학을 전공한다고 말하면 대부분 이런 질문을 듣게 된다. "Katholisch oder evangelisch?" 가톨릭이냐 개신교냐는 것이다. evangelisch라는 단어는 원래 복음적이라는 의미이지만, 문맥적으로는 개신교라는 의미를 가진다. 이와 구분되는 evangelikal이라는 단어도 별도로 있는데, 이는 한국에서 흔히 말하는 "복음주의적" 또는 영미권에서 쓰이는 "evangelical"의 의미와 비슷하다. 이 때문에 '복음주의 신학'이라는 말은 evangelical theology라는 영어 단어나 evangelikale Theologie라는 독어 단어의 번역어로는 적절할 수는 있겠지만 evangelische Theologie라는 독어의 번역어로는 부적절하다고 본다. 

신 선생님의 번역에서도 나타나듯 evangelisch라는 말은 복음적이라는 본래적 의미와 개신교적이라는 문맥적, 상황적 의미를 모두 함축하고 있다. 만약 이 강의의 제목이 바르트의 것이 아니라 그냥 어느 대학의 강의 목록(Vorlesungsverzeichnis)에서 온 것이었다면 "개신교신학 입문"이라는 번역은 별 문제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바르트가 의도하고, 여기서 이야기하고 있는 Evanglische Theologie가 가지고 있는 의미는 그것보다 이 단어의 본래적 의미인 복음적 신학에 더 가까워보인다. 이는 제 1강에서부터 잘 드러나는데, 다음의 대목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Es genüge also ohne alle distanzierende oder auch kombinierende Gegenüberstellung und Wertung die einfache Anzeige: die Theologie, in die hier eingeführt werden soll, ist die evangelische Theologie. Das erklärende Adjektiv erinnert an das Neue Testament und zugleich an die Reformation des 16. Jahrhunderts. Es mag gleich auch als das doppelte Bekenntnis gelten, dass die Theologie, um die es hier gelten soll, die ist, die von ihrem verborgenen Ursprung in den Dokumenten der Geschichte Israels her zuerst in den Schriften der Evangelisten, Apostel und Propheten des Neuen Testaments unzweideutig ans Licht getreten und die dann in der Reformation des 16. Jahrhunderts neu entdeckt und aufgenommen worden ist. Konfessionell ausschließlich kann und soll der Ausdruck (schon weil er zuerst und entscheidend auf die in allen Konfessionen irgendwie respektierte Bibel zurückweist) nicht gemeint sein und verstanden werden. Nicht alle "protestantische" ist evangelische Theologie. Und es gibt evangelische Theologie auch im römischen, auch im östlich-orthodoxen Raum, auch in den Bereichen der vielen späteren Variationen und auch wohl Entartungen des reformatorischen Neuansatzes. Mit "evangelisch" soll hier sachlich die "katholische", die ökumenische (um nicht zu sagen: die "konziliare") Kontinuität und Einheit all der Theologie bezeichnet sein, in der es inmitten des Vielerlei aller sonstigen Theologien und (ohne Werturteil festgestellt) verschieden von ihnen darum geht, den Gott des Evangeliums, d.h. den im Evangelium sich kundgebenden, für sich selbst zu den Menschen redenden, unter und an ihnen handelnden Gott auf dem durch ihn selbst gewiesenen Weg wahrzunehmen, zu verstehen, zur Sprache zu bringen. Wo es sich ereignet, dass er der Gegenstand menschlicher Wissenschaft und als solcher deren Ursprung und deren Norm wird, da ist evangelische Theologie. (S. 11-12)

다음은 신 선생님의 번역이다. 

여기서 그러한 많은 신학들을 멀리하거나 혹은 그 신학들과 결합하려는 어떤 만남이나 평가는 없다. 여기서는 다음과 같이 제시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우리가 소개하려는 신학은 "개신교신학"이다. "개신교적" 혹은 "복음적"이라는 두 가지의 의미를 지닌 "evangelisch"라는 독일어 형용사는 신약성서와 16세기 종교개혁을 생각나게 한다. 그래서 여기서 전개될 '개신교(복음적)신학'과 관련해 다음 두 가지가 고백된다. 첫째, 그 신학의 근원은 먼저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 은폐되어 있었다가 신약성서의 저자들, 사도들, 예언자들의 문서 안에서 명확하고 밝게 드러났다. 둘째, 그 근원은[각주:1] 그 후 16세기의 종교개혁에서 재발견되고 재수용되었다. 그러므로 "개신교적"(복음적)이라는 표현은 어느 한 교파만을 배타적으로 지칭할 수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 왜냐하면 그 표현은 모든 교단이 어떤 방식으로든 존중하는 성서를 우선적·결정적으로 가리키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프로테스탄트 신학"이 복음적인 개신교신학인 것은 아니다. 또한 로마교회의 영역에도, 동방 정교회의 영역에도, 그리고 종교개혁적 새 명제가 변주되고 더 나아가 변질된 훨씬 후대의 영역에도 복음적 신학은 존재할 수 있다. 여기서 내적으로 "보편적"(가톨릭적)이라는 의미는 "복음적"(개신교적)이라는 의미와 함께 모든 신학들의 연속성과 통일성을 가리킬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공의회적'이 아니라 '교회일치적'이라는 의미에서 그러하다.[각주:2] 이제 우리의 "개신교신학"을 다른 많은 종류의 신학들 한가운데서 그것들로부터 (아직 어떤 확정적인 가치판단은 없이) 구분하는 것은 다음에 달려 있다. 개신교신학은 복음의 하나님을, 즉 복음 안에서 스스로를 알리시고 인간에게 말씀하시며 인간들 사이에서 인간에게 행동하시는 하나님을 (바로 그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방법에 의해!) 인지하고 이해하고 언어로 표현한다. 바로 그 하나님이 인간적 학문의 대상이 되시는 곳, 바로 그분이 그 신학의 근원과 규범이 되시는 사건이 발생하는 곳, 그곳에 개신교신학은 존재한다. 

몇몇 부분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 '복음적 신학(die evangelische Theologie)'이라는 번역어를 일관적으로 사용하면서 직역에 가깝게 옮겨보았다.

그래서 거리를 두려거나 혹은 결합하려는 비교와 평가 없이, 다음의 한마디면 충분할 것이다. 여기서 소개될 신학은 복음적 신학(die evangelische Theologie)이다. 복음적(evangelisch)이라는 형용사는 신약 성서와 16세기 종교 개혁을 동시에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두가지 고백이 성립하는데, 여기서 다뤄질 신학이 이스라엘 역사의 문서 속에 감춰진 뿌리로부터 먼저 신약 성서의 복음사가, 사도들, 예언자들의 기록에서 분명하게 나타난 신학이며, 그 후 16세기 개혁 속에서 새롭게 발견되고 받아들여진 신학이라는 것이다. 이 표현은 (우선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 표현이 모든 교파에서 어떻게든 존중하는 성서를 지칭한다는 사실 때문에라도) 교파를 구분하는 의미로 쓰일 수 없고, 그렇게 쓰여서도 안되며, 그렇게 이해될 수도 없고, 그렇게 이해되어서도 안된다. 모든 "프로테스탄트" 신학이 복음적 신학인 것은 아니다. 로마 교회나 동방 정교회의 권역에서, 또한 종교개혁적 새 출발에서 발생한 많은 후대의 변형들과, 나아가 변종들의 영역까지에서도 복음적 신학은 존재한다. "복음적"이라는 말은 여기서 객관적으로 이 신학의 모든 보편적, ("공의회적"은 말할 필요도 없고) 교회일치적 연속성통일성을 지칭하는 것으로 사용되어야 하며, 그러한 모든 수 많은 신학들의 중심에서, 또한 (가치판단을 내리지 않고) 이 신학들과 다르게 복음하나님을, 즉 복음 안에서 자신을 알리시고, 스스로 인간에게 말씀하시며, 인간들 속에서나 인간들 곁에서 행동하시는 하나님을, 그분이 스스로 지시하시는 길로 받아들이고 이해하며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이 신학 속에서 하려는 것이다. 그분께서 인간적 학문의 근원으로나 규범으로나 그 학문의 대상이 되시는 일이 발생하는 곳, 그곳에 복음적 신학이 있다. 

바로 이 대목에서 바르트가 여기서 이야기하려는 신학이, 단순히 개신교라는 '교파의 신학'이 아니라, '복음의 하나님을 다루는 신학'임을 알 수 있다. "모든 개신교 신학이 복음적 신학"인 것도 아니고, 가톨릭 교회나 정교회에서도 이 '복음적 신학'은 존재한다. 

또한 바르트가 직접 서문을 쓴 미국판이 '복음주의 신학'이라고 오해될 수 있는 Evangelical Theology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을 보아도, 바르트가 evangelisch라는 단어의 '개신교적'이라는 의미보다 '복음적'이라는 의미에 무게를 더 두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새로운 번역이 나온다는 것은 반가운 일임이 틀림없다. 



개신교신학 입문

저자
칼 바르트 지음
출판사
복있는사람 | 2014-10-15 출간
카테고리
종교
책소개
칼 바르트의 마지막 명강의를 만나다! 새로운 번역과 장정으로 소...
가격비교


  1. 원문의 구조를 고려하면 사실 재발견되고 재수용된 것은 '근원'이라기보다 '(복음적) 신학'이라고 봐야 한다. [본문으로]
  2. um nicht zu sagen이라는 관용구가 잘못 해석된 것 같다. [본문으로]
신고

'흐름'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개신교신학 입문?  (0) 2015.04.12
시작에 관해서  (0) 2015.03.31
파편들  (0) 2015.01.04
나 가는 곳  (0) 2013.01.23
세 사람  (0) 2012.01.18
Posted by Fleur de Sel 트랙백 0 : 댓글 0

시작에 관해서

2015.03.31 08:57 from 흐름

다시 그가 한 말을 떠올려 보자면, 


"전진이란 [...] 언제나 다시 한 번 시작부터 시작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우리가 언제 한 번이라도 제대로 시작한 적이 있던가? 우리는 지금까지도 문 앞에 서있는 것은 아닌가? 이 문이 우리에게 맞는 바로 그 문인지 아직까지도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에? 


의식은 흘러간다. 항상 시간성의 문제와 결부된다. 


글은 그 자체로는 멈춰있다. 글은 일반적으로 그 추상성*이 회화 등의 장르보다 낮은, 특수한 형태의 그림이라고 정의할 수 있지 않을까? 의식은 이 그림을 보며, 훈련된 알고리즘을 통해 해석하며, 말하자면 다시 의식화한다. 이를 나는 '읽는다'고 표현한다. 


(*Diese Abstraktheit ist schon quantifizierbar, weil wir ja empirisch messen können, wie konsequent ein Bild interpretiert wird.)


이 관점에서 글을 쓴다는 행위의 어려움은 일종의 Zeitinkonsistenz (시간-비일관성?) 문제에서 비롯된다. 의식이 문장화되었을 때, 즉 글의 형태를 가지게 되었을 때, 이미 의식은 저 너머로 흘러가 버렸다. 


생각은 다차원적이다. 여러 축의 이런저런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 보통 n>4 차원적 문제의 시각화는 일정 정보의 손실을 불가피하게 수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글을 쓴다. 

신고

'흐름'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개신교신학 입문?  (0) 2015.04.12
시작에 관해서  (0) 2015.03.31
파편들  (0) 2015.01.04
나 가는 곳  (0) 2013.01.23
세 사람  (0) 2012.01.18
Posted by Fleur de Sel 트랙백 0 : 댓글 0

파편들

2015.01.04 06:30 from 흐름

(0) 이 글은 왜 쓸까? 나는 우리 모두가 예술가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삶으로 저마다의 예술을 펼치는 그런.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예술가”들에게 그림은 왜 그리는지, 음악은 왜 연주하는지, 연기는 왜 하고, 이야기는 왜 지어내는지 묻는다면 그들은 뭐라고 대답할까?

지금 나에게 글은 왜 쓰냐는 질문은 그런 질문들과 과연 동치의 관계에 있는 것일까? 차라리 그들에게 TV는 왜 보고, 친구들과 메시지는 왜 주고 받고, 신문 기사는 왜 읽고 있냐고 묻는 질문과 같은 차원의 것이라고 하는 쪽이 더 그럴듯하지는 않을까?

어떻게 보면 대답할 필요가 있을까 싶은, 대답하기 귀찮은 질문들, 평소라면 하지 않을 그런 질문들을 계속 하고 있다. 왜 한국에는 빅맥 세트가 3유로 정도 밖에 안하는가? 왜 독일에는 상하이 스파이스 치킨버거가 없는가? 한국 버터는, 푸딩은 왜 이렇게 비싼가? 그리고 이렇게 질문하는 것은 과연 바람직한 것인가?

(1)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우리는 알게 될 것이다.” 힐베르트는 왜 그런 수학자 답지 못한 무책임한 명제를 남겼을까? 본회퍼의 삶과 신학을 떨어트려서 보는 것은 가능한가? 그게 좋은 일인가? 누가복음서의 저자는 과연 바울서신에 언급되는, 골로새서가 말하는 “의사 누가”인가? 그렇게 믿는 것이 좋은 것인가? 예배당에서 제단이 사라진 이유와 강단 뒤의 십자가가 스크린으로 덮힌 이유는 서로 충돌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1a) 사실의 판단은 그 옳고 그름을 누구에게 묻든 같은 대답을 들어야 하는 문제다. 현대의 학문은 대부분 이 문제를 놓고 씨름한다. 많은 사람들이 어떤 학문을 놓고 과학인가 아닌가를 정의할 때, 이 문제를 다루는지 아닌지를 본다. 나는 누가복음이라는 문서를 쓴 사람이 골로새서의 “의사 누가”라고 굳이 믿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성서는 이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누가복음서, 사도행전 어디에서도 저자의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단지, 이레네우스 이래로 그렇게 추측해온 이론이 교회의 전통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회의적으로 사고하고, 종교에 일반적으로 비판적인 이들은, 교회가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누가복음의 저자는 의심할 여지 없이 누가”라는 가르침을 줄 때, 이것을 도그마라고 부르며 공격한다. 종교의 문제에 대해서 “왜?” 라고 질문하는것, 그리고 그 “왜?”에 답하는 것, 이것이 불가능하다고 보기에, 소통의 가능성이 없다고 보기에 교회를 비판한다. 소통가능성이 사라질 때, 그 문제는 공적인 영역이 아니라 사적인 영역으로 남는다.

헤르만 바빙크는 “어떻게 아는가?”라는 질문에 “‘성령이 알려주신다’는 것 이상으로는 알 필요도 없고 알려고 해서도 안된다”고 했다고 한다. 하나님의 권위에 의지하고 맡기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문제에 그러한 답변으로 일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존 스토트의 책을 읽다가 그가 인용한, 작년에 작고한 판넨베르크의 글귀가 마음에 들었다.

“설득력이 없는 메시지가 단지 성령에 의존한다고 하여 설득력을 얻을 수는 없다… 기독교 메시지의 설득력은 그 내용으로부터만 나올 수 있다. 내용이 없을 경우 성령에의 의존이 전파자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논증과 성령의 역사는 상호경쟁적인 것이 아니다. 바울은 성령에 의존하면서도 생각과 논증을 아끼지 않았다.”

“정말로 그러한가?”, “왜 그러한가?”라는 논증의 가장 밑바닥에는 의심이 있다. 의심을 단순히 믿지 않는 것이라고 얕게 치부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의심이라는 소금 없이 굳건한 믿음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더욱 치열하게 싸워야 한다. 더욱 겸손하고 엄격해져야 한다. 그래서 그 질문들을 뛰어 넘어야한다.

(1b) 하지만 신앙이란 어쩐지 교회 밖에서만 사적인 문제로 여겨지지 않는다. 성서에 쓰여진 “말씀(Logos)”이라는 단어는 아무런 의심 없이 “기록된 말씀(Scripture)”과 동치의 관계로 받아들여진다. 그리고 이를 통해 말씀은 “함께 듣는 것”에서 “스스로 읽는 것”으로 그 무게가 옮겨져 갔다.

듣는 것과 읽는 것 사이에는 질적인 차이가 있다. 바울은 믿음이 들음에서 난다고 했다. 순수한 들음은 인격적인 경험이다. 듣기 위해서는 화자와 청자가 시공을 공유해야 한다. 그들이 같은 때와 같은 곳에 있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부버의 개념을 어쭙잖게 조금 빌려오자면, 듣는 것은 “나와 너(Ich und Du)”의 관계에서만 가능하다.

하지만 세상이 변한 것은 사실이다. 사람들은 늘 대체재를 개발해왔다. 그림, 글, 녹음기, 카메라, … 하지만 어떤것도 “들음”이 가지고 있는 본래의 모습(Substantiality)을 완전하게 대체할 수는 없다. 이것들은 “나와 그것(Ich und Es)”의 관계일 뿐이다. 혼자 끙끙거리며 이사야서를 읽던 에티오피아 내시의 마음을 흔들어 놓은 것은 빌립이 전했던 어떤 정보 때문만이 아니라, 그와의 만남이고, 그를 통한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이라고 생각한다.

들음은 본질적으로 수동적이다. 누군가에게 의지해야 하는 일이다. 내가 보기 싫고, 읽기 싫은 것은 눈 감아버리면 그만이다. 하지만 나의 귀는 닫을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들려지는 말씀”이다. 교회의 전통은 언제나 성서가 읽혀지게 해서 함께 듣는 것이었다. (Col 4:16, 1Th 5:27) 듣는 것은 내가 듣고 싶다고 해서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듣는 것은 하나님이 가능케 하시는 일이다. 하나님이 주어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신고

'흐름'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개신교신학 입문?  (0) 2015.04.12
시작에 관해서  (0) 2015.03.31
파편들  (0) 2015.01.04
나 가는 곳  (0) 2013.01.23
세 사람  (0) 2012.01.18
Posted by Fleur de Sel 트랙백 0 : 댓글 0

나 가는 곳

2013.01.23 00:00 from 흐름

아무래도 세상은 수만 가지 블랙코미디의 샐러드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제야 힘들게 내 알을 깨고 나온 것 같은데, 내가 있던, 혹은 아직도 있는 이곳은 그냥 한 겹의 달걀 껍질 속이 아니라 절대 혼자서는 빠져나올 수 없는 마트료시카 속이 아닐까?

내가 절대적이라고 믿었던 것은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결국 바뀌어버렸다. 겨우 내 물음표에 대한 마침표를 찾은 것 같았는데, 어느새 다시 그 위에 물음표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조용히 펜시브에 담가뒀던 사람들의 삶마저도 지금 이곳의 바람으로 내 살갗에 닿을 때, 역설적이게도 이상과는 다른 현실의 세계가 정말로 있다는 주장이 다시 설득력 있게 들려온다.

이 경계선 위에서 지금은 보이지 않는 저 대지를 향해 용기의 씨앗을 뿌리라는 그 대언자의 외침, 그 메아리가 점점 흐릿해질 때, 비로소 나는 내가 할 수 없다는 것을 내 몸으로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잘 이해되지 않는 온갖 이론의 바닷속에서 답을 구해내는 것이 나인지 아니면 내가 구해지는 것인지조차 혼란스럽겠지만, 조금 더 높게 그러면서도 더 낮게 서로의 생각 위를 가볍게 둥둥 그리고 또 나무 아래 뿌리처럼 깊게 우리의 마음이 들어야 할 멜로디를 풀어놓아야 할 텐데,

너와 나의 뒤엉킨 내러티브, 그 들리지 않는 알람 소리만, 두려움을 감싸고 은은히 울려 퍼진다.

나 가는 곳


신고

'흐름'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개신교신학 입문?  (0) 2015.04.12
시작에 관해서  (0) 2015.03.31
파편들  (0) 2015.01.04
나 가는 곳  (0) 2013.01.23
세 사람  (0) 2012.01.18
Posted by Fleur de Sel 트랙백 0 : 댓글 0

세 사람

2012.01.18 20:30 from 흐름

반대편 열차가 도착한다. 오랫동안 떠나지를 않는다. 첫차이기 때문일까. 이어서 이쪽 열차도 도착한다. 문이 열렸지만 빈자리는 보이지 않는다. 환승객을 위해 잠시 정차한다는 말이 들린다. 열차는 47분에 다시 출발한다. 시간을 확인하고는 어딘가에 적어 둔다. 나이가 많아 보이던 대부분의 승객들은 열차가 마지막 역에 도착해서야 내린다. 그들은 문이 열리자 마자 뛰어나간다. 영문도 모르고 조금씩 두려움과 마주한다. 발걸음은 자연스레 빨라진다. 

 

기억이 외치는 곳에는 무언가가 고여있다.

물은 고이면 썩기 마련이지만 이곳에는 썩은 내가 나지 않는다.

바다에 소금을 뿌린이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 내 속의 나는 그곳에 용기를 뿌린다.

용기는 두려움을 이겨내어 고요한 이곳이 보이지 않게 요동치게 한다. 

하지만 용기는 안된다는 좌절에서부터 시작한다는 사실은 이미 잊혀졌다. 

"더 알면 알 수록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더 잘 알게된다." 

그곳에는 내가 있다.

 

이른 시간 그리고 그렇게 늦지 않은 시간. 버스는 파란 선 안에서 달린다. 선과 담 사이로 유유히 도시를 빠져나간다. 나는 그 담장 위에 서있다. 나는 그 모든 것의 사이에 서있다. 과거와 미래, 동과 서, 남과 북 그리고 나와 나. 마치 햄릿이 물었던 것처럼 있음과 없음의 사이에서 망설이고 있다. 그 모든 것들이 나를 유혹한다. 나를 지배하려 한다. 하지만 나는 어느 곳에도 속할 수 없음을 안다. 나의 어떤 바람, 소망도 의미가 없이 그렇게 끊어져 버린다. 나는 그렇게 모호하게 있다.


신고

'흐름'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개신교신학 입문?  (0) 2015.04.12
시작에 관해서  (0) 2015.03.31
파편들  (0) 2015.01.04
나 가는 곳  (0) 2013.01.23
세 사람  (0) 2012.01.18
Posted by Fleur de Sel 트랙백 0 : 댓글 0

티스토리 툴바